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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an 22. 2024

덕후아들의 덕질 연대기

노는게 곧 학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엄마는 뒤에서 거들 뿐

첫째가 방학을 했다. 올해 초4에 올라가는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학원이라고 체육관에서 운영하는 축구 프로그램이 유일하다. 그렇다고 대단한 엄마표 학습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해준 건 오로지 아이의 덕질을 지지해주는 것 뿐이다. 아이는 태어나서 7개월부터 덕질을 하기 시작했다. 장난감 포그레인을 손에서 놓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중장비에 빠졌다. 그러다 소방차로 한 1년 넘게 우려(?)먹었다. 소방차를 종류별로 외우고, 도서관에 가면 온갖 소방차 책을 찾아 테이블에 깔아줬고, 동네 소방서로도 자주 놀러갔다. "빨간 자동차가 삐뽀삐뽀~" 동요도 유튜브에 버전별로 틀어달라고 요구를 해서 원하는 버전으로 들려줬다. 소방차에 빠지다가 어쩌다 고래를 만났고, 바다생물에 빠져 '옥토넛'으로 다양한 해양생물을 알게됐다.


그러다 5살 후반에 드디어 '공룡'을 만났다. 공룡은 정말 지긋지긋하도록 나를 단련시켰다. 공룡 박물관도 다니고, 공룡스티커를 사고, 공룡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공룡책들이 책장에 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고마운건 공룡으로 스스로 한글을 뗐다는 것. 6살부터 공룡 이름을 스스로 쓰기 시작하더니 혼자 한글을 뗐다. 7살이 중반에 대략 쓰기와 읽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웬만한 사교육 못지 않게 공룡에 돈을 쏟아부은 결과값은 스스로 한글뗴기였다는 것. 


여하튼 그러다 곤충이 어쩌다 찾아왔다. 곤충은 피규어로 충족되지 않는다. 결국 곤충을 키우게 됐다.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키우기 시작했고, 암수 한쌍을 구입해 교배를 해서 성공한 성충들을 키웠다. 한 여름, 떙볕에 둘째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곤충을 채집하는 아이와 동행했다. 추석 때 시댁에 내려가니 시누이가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까맣게 탔나며 물었다. 그게 다 곤충 때문이라고 하면 믿을 까? 


이런 생활을 2학년 때까지 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아이가 레트로 로봇에 빠져버렸다. 마징가Z와 로봇테권브이의 세계는 참으로 고단했다. 로봇태권브이를 볼 수 있는 체험관은 서울 동쪽끝(우리집은 경기도 서남부)이었고, 로봇들마다 프라모델 가격도 만만치 않았고, 만드는 과정도 수월하지 않았다. 중국제가 많아 부품이 조악한 것도 있어서 맞출 때마다 참을성 많은 아빠의 예민함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선을 넘지 않아 고마울 뿐ㅎㅎㅎ) 


뭐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새에 빠졌다. 조류의 세계는 더 고단했다. 대한민국에서 탐조인으로 산다는 건 얼마나 부지런해야하는지 깨달았다. 이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둘째를 어르도 달래 탐조를 하러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새덕후 김어진 형아가 얘기한 파주 공릉천 탐조도 갔고, 휴전선 근방 독수리 식당에 가서 환경연대 사람이 주관하는 먹이주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생고기를 뜯어먹는 독수리를 좀더 잘 찍을 수 있도록 아이의 아빠는 카메라라인과 가까운 곳에 고기를 뿌렸고, 덕분에 좀더 가깝게 볼 수 있었다. 경남 창녕까지 한 여름에 차로 달려 따오기를 보러가기도 했다. 겨울 속초에도 탐조포인트가 있다는 걸 알게되었고(영랑호만 알았는데 청초호가 훨씬 크고 새들이 많았다.) 동네에 있는 산에 한여름에 올라 동고비와 쇠딱따구리를 봤고, 저어새생태학습관이 있는 인천 남동유수지에서 하는 프로그램도 참여했다. 조류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고,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다. 


얼마전, 방과후학교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던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드디어 밀화부리를 봤다고 한다. 상모솛새도 발견했는데 사진을 찍어도 도망가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동네 새들은 이제 너무 많이 봤기에 아이도 겨울 탐조를 주춤하고 있었던 찰라, 처음 본 새를 만난 것이다. 이토록 뭔가에 빠져 늘 각성이 높은 상태인 아이. 어릴 때부터 자는 것부터 먹는 것도, 노는 것도 남달라 엄마의 진을 다빼놓고 나서 잠이 들었던 그 아이. 그 아이가 이제 초4가 된다. 변화는 이미 감지됐다. 아이는 이제 친구들과 노는 걸 가장 좋아한다. 친구들과 놀면서 속상해하기도 하고, 아예 절교를 하기도 한다. 초3 생활통지표에 담임선생님이 밝고 긍정적인 아이라도 표현해주셨는데, 여튼 집에서와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나보다. 잘 적응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


최근엔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초2 때 친구와 같이 그리고 있는데 주말마다 만나 그리고 있다. 대사는 많지 않다. 초2 때는 로봇의 세계에 빠져있던 시기라 그 때의 색깔이 많이 묻어나온다. 덕질을 해둔 덕에 스토리며 용어들(격납고 등)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다. 새에 대해서는 조금 시들해진 것 같다. 또 다른 덕질꺼리를 아이는 커가면서 찾게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하다. 바로 위에 언니는 좋아하는 연예인이 자주 바뀌었다. 그래서 맨날 금사빠라고 놀렸는데, 한 연예인을 오래도록 깊게 좋아하는 나로써는 도저히 언니의 행태가 눈에 거슬리고 용납이 안됐다. 생각해보니 요아이는 나와 언니의 성향 두 개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 같다. 일단 좋으면 마음이 동한다. 그쪽으로 덕질의 뱡향을 옮긴다. 대신 1년 이상 그 세계에 빠진다. 최대 3년까지 좋아했던 아이였다. 빠지면 푹 빠진다. 이건 완전 나의 성향이었다. 너무 푹빠져 대한배구협회에 툭하면 전화걸고, 합숙소도 찾아가고, 공항도 갔던 나(사생팬에 가까운)를 떠올렸다. 


우리 집안 어딘가에 덕질의 DNA가 있는게 아닐까. 남편집안 쪽으로 볼 수 없는 덕질. 오빠의 첫째이자 나의 조카 중 한명인 윤아는 일본애니메이션 덕질 중이다. 보는걸로 그치지 않고 직접 그린다.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림의 방향도 정해서 한때 유튜브도 했고, 지금도 온갖 덕질 중이다. 첫째도 그렇게 또 다른 덕질을 할 것이다. 덕질의 장점은 깊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뼛속까지 새겨지는 당시의 나, 나란 존재의 감정과 기억들을 덕질은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아이의 성장과 덕질은 정비례할 것이다. 


그리고 기대된다. 아이의 새로운 덕질이! 덕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아이를 보면서 나 역시 세로운 세계에 종종 발을 걸치게 되어 기쁘다. 사실 올해 11살이 되는 아이가 엄마를 찾는 시간을 진짜 얼마남지 않는 것 같다. 사춘기가 되면 자신만의 세계로 노를 저어갈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니 아쉬워서 슬퍼할지도 모를 나를 위해서라도 아이와 있는 시간엔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해본다. 최대한 귀를 열고 들어주는 것! 이것이 아익가 지금 내게 가장 원하는 것!이다. 


사실 엄마는 네가 성인이 되어도 귀를 열고 마음을 열테니 어떤 얘기는 맘껏해도 좋아!

엄마는 항상 이 자리에 있을게.


아... 괜히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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