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 가족을 즐겁게 했던 반려곤충들을 떠나보내며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그때가 오면 어떤 기분일까 미리 상상하기도 했다. 막연하게 울컥하겠지라며 잠시 잊고 지냈다. 그런데 여름휴가 마지막날, 남편의 한 마디에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우리가 이번 휴가 때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 남았어"
냉동실 한 켠에 모셔둔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 친구들다. 그동안 수명을 다한 사슴벌레친구들을 냉동실에 보관해뒀다. 냉동실 한 켠, 밀폐시켜 그들의 죽음을 묵도한 것이다. 이제 그 친구들은 보내줄 때가 된 것이다. 첫째는 올해 11살이 되었다. 재작년 가을부터 새에 빠져 조류덕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7살 가을부터 시작해 초2까지 약 3년간 곤충덕후였던 아이는 종목을 바꾼 것이다. 그동안 곤충 관리를 위해 자주 찾던 00박물관이 온라인 위주로 영업방식을 바꾸면서 서서히 멀어진 것도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곤충에 서서히 관심을 잃어가던 중에 우연히 새의 세계를 접하게 된 첫째는 바로 덕질을 이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슴벌레에서 새로 넘어가는 아이를 보니, 금사빠는 아니지만, 어떻게 사랑이 쉽게 변하니?라며 의아해했다.
이후 1년 간 사슴벌레 관리는 거의 내가 도맡아했다. 50여마리 가까운 아이들이 우리집에 머물렀다. 중간중간 수명을 다한 친구들은 땅에 묻었다.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 넓적이, 장풍이, 넓적다리 등. 그러다 아이의 관심이 줄어들고, 나도 전보다 많이 신경쓰지 못하다보니 우리집 환경이 곤충들이 번성하기 어렵게 된 게 아닐까. 생물이든 무생물들이 뭐든 관심을 먹고 사는 것 같다. 관심이 줄어들면 확실히 다르다. 우리가 키운 사슴벌레들이 낳은 알에서 다시 새로운 친구들이 태어났고, 그 친구들을 키웠다. 넓적사슴벌레 수명은 최고 2년, 장수풍뎅이는 3개월, 톱사슴벌레는 1년 정도라고 한다. 같은 종이어도 아이들의 수명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고 2년에 가까워지면, 곤충친구들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그 친구들을 볼 때마다 첫째는 지나가다 한 마디씩했다.
"이제 죽을 떄가 된 것 같아"
그런다 진짜 모든 곤충들이 수명을 다하는 날이 왔다. 올해 초 겨울이었나. 우리는 사육통을 정리했고, 남편은 열심히 세척해 당근으로 내다팔았다. 그런데 아직 남은 과제가 있었으니 냉동실에 넣어둔 곤충들이다. 언젠가 표본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지만, 표본을 만든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나 결국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쌓여있던 사슴벌레들을 이젠 정말 땅에 묻어야했다.
무더운 여름, 아파트 화단 빈 땅에 땅을 파서 한 마리씩 넣어주었다. 아이들이 작업을 하면 남편이 영상으로 그 장면을 담았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없어서 다행이다싶었다. 곤충덕후시절을 떠나보내는 아들을 마주 하는게 힘들 것 같아서였다. 아이가 너무 커버린 것 같다. 더 클 수록 엄마를 떠나겠지,라고 생각하니 지난 우리 추억이 정말로 소중하구나를 깨달았다.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와 함께했던 아이의 유년 시절. 그 옆에서 함께 웃던 우리 가족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교 후 뙤약별에 아이와 함께 아파트 주변 풀숲에서 곤충을 찼던 그 시절에 나는 까맣게 그을리며 살았다. 집안일도 제대로 정리못하고, 첫째와 둘째와 함께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럼에도 체력은 괜찮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다녀도 글도 많이 쓰고, 일도 틈틈이 했으니까.
언제였던가. 2022년 첫째가 초1일 때 놀이터에서 우리는 놀고 있었다. 첫째가 줄넘기를 하고 있었나? 곤충을 찾고 있었나? 그때 누군가 나타나 다른 놀이터 근방에서 사슴벌레가 나타났다고 소리쳤다. 당시 놀이터에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나도 소리치며 달려갔다.
"뭐? 사슴벌레가 나타났다고? 가자"
그때 나는 내 등뒤로 뭔가 서늘함을 느꼈다. 주변 엄마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차가웠다. 그들은 그들끼리 모여 대화 중이었다. 나는 동네 엄마들 틈에 끼지못하는 엄마였기 때문에 내 행동이 그들에겐 기이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즐거웠다. 아이와 내가 하나의 관심사로 집중하면서 많은 추억들을 남길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슴벌레들이 이젠 집에 없다. 시원섭섭하다. 처음 사슴벌레의 죽음을 묵도했을 때가 떠올랐다. 톱돌이었나? 넓사순이었나? 첫째는 엉엉 울었다. 너무 슬퍼해서 달래는 것조차 그 어떤 의미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나보내고 밤에 일어나 사육통을 봤다. 아, 어떻게 보내지,라고 생각했던 그때를. 새벽기상을 하는지라 동이 트면, 볕이 거실로 들어오고, 그때마다 사육통을 비췄다. 나는 박스를 이용해 볕을 가려줬다. 내가 새벽에 해야할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는데...
남은 사슴벌레들을 땅에 묻은 날, 밤이었다. 첫째는 밤늦게까지 노느라 정신없었다. 그러다 같이 놀던 둘째가 잠들었다. 나도 누웠다. 첫째도 따라 누웠다. 그리고 갑자기 한 마디했다.
"엄마 나 다른 애들 묻어줄 땐 안 슬펐는데 활넓이 보낼 땐 너무 슬펐어"
그 말 한 마디에 온 몸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와 나는 한참을 안고 울었다.
"활넓이는 순하고 물지도 않고 내가 가장 많이 논 친구니까."
"활넓이가 한 번 탈출했잖아. 그떄 다시 찾아을 때 너무 기뻤어"
그래, 그때 내가 활넓이를 다시 찾았지. 현관 앞에 뒤집어있는 그 활넓이. 죽은줄 알고 심장이 멎을 뻔했지.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 곤충젤리 위에서 한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지. 그때 내가 활넓이를 발견한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혹시나 발에 밟히기라도 했으면 그 트라우마는 얼마나 오래갈까.
아이를 쳐다봤다. 이젠 어린이가 아니라 소년이 되어버린 그 아이. 아직도 엄마를 찾지만, 이제는 혼자서 스스로 하는 일이 더 많은 아이. 초등 저학년이 아니라 이제는 고학년으로 성장할 아이. 그 분기점에 서서 아이의 한 시절을 떠나보냈다. 고맙게도 사슴벌레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나니 남는건 아이와의 추억이었다. 추억할 거리가 많은 나는 첫째에게 항상 고맙다. 중장비, 고래, 공룡, 곤충, 그리고 새까지. 아이의 덕질이 우리 가족을 화목하게 소실점 같은 구실이 되었다. 먼곳에 보이는 그 지점을 따라 우리는 함께 했다. 곤충 박물관도 가고, 채집도 하고, 사육도 하고, 균사통에서 알을 넣고 그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도감을 보면서 함께 얘기도 했다. 언젠가 봐야할 호주에 사는 뮤엘어리 사슴벌레, 한 여름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두점박이 사슴벌레, 남미쪽에 사는 헬라클레스 장수풍뎅이, 인도네시아에 사는 기라파톱사슴벌레 등. 한때 우리는 곤충을 만나기위해 인도네시아에 가자고 해외여행을 가면 인도네시아에 가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켜지지 못했다. 만약에 인도네시아에 갔다면, 아이는 좀더 오랫동안 곤충을 좋아했을까. 알다가도 모를게 사람 마음이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함께 좀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기회를 놓친 건가싶기도하고. 코로나 기간이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내 맘이 그렇지 못하다.
지금은 대만, 싱가포르, 호주로 가자고 한다. 새로운 새들을 만나기위해 해외도 가야한다고 아이는 말한다. 그래, 이번엔 진짜 가보자. 나의 아이가 이런 방식으로 엄마를 찾을 날이 앞으로 얼마나 되겠는가. 아이는 점점 클 수록 친구들과 함께할 텐데, 엄마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때도 올텐데, 그럼 지금을 최대한 즐기고 싶다. 인생에서 미래는 없다. 그냥 매일이 현실이다.
나는 아이의 유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변곡점에 서있는 아이를 다시 만났다. 얼마나 클까. 얼마나 잘 자랄까. 나는 매일매일 기대한다. 이토록 반짝이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축복처럼 다가올 또 다른 현재를.
활넓이야 안녕.
넓적이야 고마워.
톱돌이 너를 만나건 정말 행운이야.
모두들 고마웠어.
안녕
2020년부터 2024년 초까지 우리와 함께했던 사슴벌레들아~
그리고 나의 어린 아들도 이젠 안녕...
결국 나는 이 모든 기억들을 다 지고 살 것이다. 버리지 못한 기억들을 마음에 품고, 종종 추억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나아가길. 앞으로 향하길. 뒤돌아보지 않고 아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고 그 길로 직진하길 바란다. 이게 엄마의 마음일까. 훗날 아들이 그 시절이 궁금해하면, 그 어떤 얘기들도 술술 풀어내는 기억장치를 가동시킬 것이다. 내 기억은 오래도록 그때 그 시절의 아들과 함께하고 있을테니까.
'아들아, 너는 다 잊어도 돼. 엄마가 너의 메모리칩이 되어줄게'
이렇게 나는 또 엄마로 성장하고 있다. 아이의 시절들을 기억하다가 포화상태가 되고, 터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엄마라는 모성애는 무한인 것 같다. 다 기억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내가 아이의 메모리칩이 되기로,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