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사라진 존재, 지금 나라는 엄마....
나는 내가 누구누구의 엄마라고 불릴거라 상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결혼 전, 나는 그냥 나였다. 내 이름 석자를 지닌 존재. 그런데 결혼 후 나는 누구누구의 엄마라고 불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들과 교류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서 엄마라는 타이틀이 좀 빈약하긴 하지만, 학교와 유치원에선 당연히 나는 00의 엄마로 불린다. 엄마로 불린다고 억울할 건 없는데 가끔 엄마의 일상이 지겨울 때가 있다.
막연하게 결혼해도 나는 일을 하고 있을 거란 자만추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가 하는 일은 규칙이 있긴 한데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9to6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8 to10, 11 to12이거나 밤을 새운다. 매일 출근을 요구하진 않지만, 내가 일할 땐 거의 대부분 상주였다. 나는 사무실 의자에 앉는다. 내 몸이 레고블록 같았다. 자력으론 빠져나올 수 없는 레고블록. 비로소 일이 끝나면, 다들 일어난다. 그때 나도 일어났다. 그런 삶이 대단히 매력적인 적도 아닌데 나는 일하는 여성을 꿈꿨다. 하지만 상주 도우미를 두지 않는 이상, 내 커리어를 유지할 방법은 없다. 남편도 자주 없다. 밤새 일하는 게 일상인 직업이다. 친정엄마에게 부탁하기엔 두 아들 케어가 만만치 않다. 그냥 나는 내 온 시간을 투여해 육아를 했다. 투자라는 표현은 애매해서 투여라고 썼다. 두 아들이 잘 되어 성공하면 그때는 투자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일을 포기했다. 우울해하는 친구는 내게 그건 너의 선택이야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선택이 맞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 서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단 한 가지, 시급한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게 나에겐 육아였고, 나의 선택이 맞긴 하다. 그런데 육아를 한 지 10년이 넘어서니 기운이 슬슬 빠지기 시작했다. 아이들 때문에 속상한 게 아니다. 남편과 얘기하다가 문득 대화의 단절은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으니 육아라는 시간이 헛된 게 아니라고 했다. 육아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서 나중에 책을 내면 또 얼마나 좋으냐고. 대단한 성과를 바라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적어내려가면 책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런데 화가 났다. 그 책 안에서도 나는 엄마니까. 나는 내가 엄마로만 나를 증명해야 하는, 그 방식이 싫었다. 글을 쓰는데도 육아맘으로의 입장을 써야 한다는 게 서글펐다. 나는 그것밖에 없는 건가. 그럼에도 그런 타이틀로 성공한 유튜버도 많다. 그런데 나는 왜 싫다는 건가. 내가 바라는 인정욕구를 좀 더 채울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냥 싫다. 나는 그냥 나란 존재로 증명하고 싶다. 글을 쓴다면 엄마라는 타이틀보단 소설가나 시인으로 불리고 싶다. 물론 지금은 두 분야에서 대단한 결과물을 내고 있진 않지만, 나는 나로 살고 있다. 전업맘은 특히 지긋지긋하다. 내가 살림경제를 꾸려나가려면, 남편에게 돈을 받아 사는 게 아니라 내가 경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이 주는 돈은 한계가 있다. 남편에게 고맙긴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내가 싫다.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는 존재로 산다는 게 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괴감이란 상처만 남길 뿐이다. 나는 내 안의 상처들이 가득 차있다는 걸 안다. 매달매달 카드값을 걱정하고, 매일매일 밥상에 오르는 식재로의 단가를 고려하고, 아이들의 간식도 무제한이 불가능하니 제한을 둬야 하고, 학원도 보내야 하고, 책도 사야 하고, 여행도 가야 한다. 자본이 드는 활동엔 돈이 들어간다. 그러니 남편에게 언제까지 돈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 성공하는, 덕업일치의 삶을 꿈꾼다. 그야말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건데 이건 또 끈기가 중요하다. 그리고 나처럼 소심한 사람에겐 마음다짐이 중요하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하루종일 불안에 떤다. 불안이 내 온 에너지를 잡아먹는다. 나는 늘 잡아먹히는 피식자이다. 피식자로 사는 괴롭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니. 그때마다 나는 도마뱀처럼 꼬리를 잘려도 재생의 마법을 부려야 한다. 엄마니까 아이들에게 사라지면 안 되는 존재니까.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대게는 기분이 좋지만, 남편과 싸우고 나서는 만사가 귀찮아지고,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적게 둔다. 엄마의 주변 공기가 다르다는 걸 감지하면 예민한 감각을 동원에 첫째가 계속 안아달라고 한다. 안아달라고, 그냥 안아달라고, 한 번 더 안아달라고. 나의 두 팔이 아이를 안고 있지만, 내 머리는 복잡하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엄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그러다 두 아이들이 엄마 옆에 붙어 책을 읽고 있으면, 나를 사랑하는 존재가 둘이나 있구나라며 마음이 화해진다. 6살 때 둘째가 우리 집에 엄마를 좋아하는 남자가 하나 있다고 이미 선포했다. 그게 바로 나라고. 그런 아이를 보고 있는데 왜 나는 서글플까.
종종 첫째가 늦게 자면, 속으로 부글부글 거린다. 제발 좀 엄마만의 시간을 위해 자줄래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꾹 누르고 둘째 옆에 누워있다 잠이 든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후회한다. 나는 잠시 엄마라는 존재의 시간보단 나란 존재의 시간이 매일매일 한 시간 이상씩은 필요한데 그 시간을 사수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에 대해. 사는 게 다 지옥 같은 것도 아니고, 힘든 것도 아닌데, 나는 나란 존재를 키워나갈 물을 줄 시간이 없다는 게 서글픈 것 같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본지도 너무 오래됐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은 이제 사라졌다. 의욕이 있어야 식욕도 생기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건 경험은 단단로 끝난다. 쭉 이어지면 좋겠지만, 잘 못한다.
결국은 나의 문제인가?라는 귀결은 이제 너무 식상하다. 아침에 잠깐 명상을 했다. 새벽기상도 이제 점점 시간이 뒤로 밀리고 있다. 아이들이 동시에 일찍 자면 잘 수록 내 시간이 길어진다. 하지만 이젠 그 방법도 아닌 것 같다. 나는 나의 시간을 사수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이들이 없을 때, 아이들이 잘 때만을 바라보며 시간이 톡 하고 사과만큼 덩어리째 떨어질지 없다. 먼지가 날리듯 숨을 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내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내 시간을 태워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불을 뜨겁게 좀 더 태워야 하는데 요즘엔 연료가 부족하다. 연료는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유하는 시간을 사수하는 방법 말고 다른 방식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누군가에 나를 증명할 이유는 없지만, 나는 종종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다. 욕망이 사라지고 있다. 물욕도 없다. 식욕도 없다. 숨을 쉬는데 나는 달팽이 같다. 짐을 지고 느리게 이동하는 달팽이. 집도 없는 민달팽이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무에서 시작되는 건 자유라는 붉은 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