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하는 입장에서 주방 개수대 앞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물소리와 식판 달그락거리는 소리 외에 다른 잡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 하나에 집중하는 시간만큼 놀라운 건 없다. 이토록 단순해질 수 있다니. 자석처럼 세상사 온갖 불안들을 끌어당기던 내가 집중한다. 그것도 신경질적으로.
이를테면 식판을 닦는 작업은 그날 어떤 반찬과 국이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다. 즉, 나의 업무량은 그날그날의 메뉴에 따라 다르다는 것. 생선조림에 돈가스가 나오던 날이었다. 생선조림의 기름진 양념이 식판에 베인다. 닦고 확인하고 또 닦아야 한다. 돈가스 소스를 따로 식판 모서리 동그란 홈에 담는 사람도 많다. 내식대로라면 소스를 그냥 돈가스에 뿌리지만, 찍먹파들은 용납하지 않을 듯. 그런 날에 양념과 소스가 범벅이 된다. 소스는 웬만한 물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식판과 물아일체가 되어 붙어있다. 동그란 홈은 식판홈 중에서 가장 면적이 적다. 수세미가 지나칠 수도 있다. 물에 오래 담가도 잔존한다. 그래서 확인해야 한다. 생선양념은 색이 베이는 경우가 많아 수세미로 빡빡 문질러야 한다. 채식식당이었다면 이보다 덜 고됐을까?
하지만 식판 설거지의 화룡정점 아니 애물단지라는 표현이 맞다. 바로 밥알 설거지. 식판에 밥알이 붙어 떨어지지 않을 경우가 많다. 오븐에 밥을 하는데 사람들마다 밥을 푸고, 먹는 방식이 달라 유난히 밥알이 식판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초벌 설거지와 불리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바쁠 땐 대충 한다. 대충 하고 싶지 않아도 속도를 내게 되면 오류가 발생한다. 일단 뒤편에 작은 개수대에 초벌 한 식단들을 무더기로 가져와 물로 대충 씻는다. 이때 철수세미로 밥을 담은 홈을 문질러주면 좋다. 바쁘면 그냥 다 패스이다. 물을 바가지로 몇 번 부어 양념들을 씻어낸다. 그리고 따뜻한 세제물에 담근다. 불리고 있는 식판들 밑에 깔아야 한다. 밑창 깔기 신공이 필요하다고나 할까. 물속에선 밥그릇하나도 무게감이 남다르다. 그러니 식판에 대여섯 개 붙어있으면 이를 들어 올리는 것도 힘이 필요하다. 그래도 밀어 넣어야 한다. 우주의 기운을 모아야 한다. 나 혼자로는 불가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불린 식판을 순서대로 닦는다. 수세미로 민 식판은 헹굼물 속에 넣는다. 그곳에서 두세 번 물에 담갔다 뺀 후, 식세기 정리대에 넣는다. 차곡차곡 많이 넣는 게 중요한다. 식세기 가동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릇을 꽂는 지지대들이 칸을 만들어 6칸이 된다. 맨 끝에 있는 틈엔 식판 하나가 들어간다. 나머지 홈에 식판이 두 개씩 들어간다. 하나는 안쪽에 붙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에 붙여 꽂는다. 지그재그식으로 꽂아야 설거지 면적도 넓어지고, 좀 더 빠르게 마른다. 그릇은 꽂이 두 개가 필요하다. 한 줄에 6개 정도 들어가는데 가능하면 옆으로, 위로 좀 더 쌓아 올린다. 다 정리가 되면 옆에 있는 식세기로 밀어 넣는다. 나는 매번 끙끙 내며 넣는다. 그릇이 무너질 것 같기도 해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내 팔힘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장은 이런 나를 볼 때마다 쯧쯧 댄다. 주방일을 하기엔 힘이 약하다는 것. 아마도 알 것이다. 겨우겨우 밀어 넣는다. 5분 안에 설거지가 끝나는데 뛰뛰~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면, 바로 식세기를 열어 옆에 빈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그곳에서 잠깐 말린 후 오픈 옆 공간에 식판을 쌓아둬야 한다. 바쁠 땐 식세기에서 꺼내만 두고 정리는 하지 못한다.
어느 날은 설거지하느라 바쁜데 사장이 나보고 이렇게 음식물 쓰레기가 쌓였는데 뭐 했냐며 호통을 쳤다. 나는 도대체 그릇은 계속 나오고, 손님들이 계속 음식물을 비워내는데 그 틈새를 어떻게 잡아채 쓰레기통까지 갈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설거지만 하는 게 아니라, 빈 수저통도 꺼내서 한 번씩 비워 식세기 돌릴 수 있게 세팅을 해야 하고, 틈틈이 걸레로 지저분하지 않게 닦아야 한다. 헹굼물은 금세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새물로 갈아줘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걸 틈틈이 눈치껏 해야 함을 안다. 그런데 그들의 속도가 나와는 다르다. 그들은 빠르게 등장해 일을 해놓고, 나를 원망하는 눈치를 준다.
사장이 하루에 버는 수익에 비하면 내가 버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단 3시간의 노동으로 일당을 받아간다. 시급은 일반 알바보다 높지만, 고되다. 몸을 쓰는 노동의 강도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사장의 잔소리도 내게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귀가 막혀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하면서 청각은 잠시 쉬어도 된다. 시각을 통하 재빠른 손놀림만이 요구된다. 후각도 접어야 한다. 음식물 냄새와 락스 냄새를 맡아가면서 하는 일이니까. 감각을 차단시켜 최대한 몰입해야 한다. 촉각 역시도 감각을 잠재워야 한다. 눅눅한 비닐앞치마, 물이 세는 고무장갑, 그 안에 젖은 면장갑, 뽀송뽀송함을 지향하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감내하기 힘들 수 있다. 다만 바닥이 장화에 닿는 감각을 최대한 살려둔다. 미끄러지면 끝장이다. 나는 산재보험도 되지 않는 일용직 노동자이니까.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내 몸을 구제하는 방법에 노력에 기울인다. 이렇게 일하다 보니 미각이 사라진다. 손님들이 간 후, 1시 10분이 넘으면 그제야 점심시간이다. 밥을 준다는 게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럼에도 밥을 먹는 건지 해치우는 건지 잘 모르겠다. 밥맛이 나지 않는다. 뭐가 맛있고 내 입맛에 맞는지 모른다. 나는 그저 먹는다. 주린 배를 채우는 이유는 남은 설거지를 할 에너지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나는 이런 노동의 가치를 외면했던 게 아닐까. 알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나는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이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때나마 자만했던 게 아닐까.
나이가 들어 노동시장에서 나란 존재의 메리트는 거의 전무해졌다. 나는 앞으로 벌어먹고 살 생계가 아득하다. 그 아득함의 이유는 10년간의 육아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를 맡아 키워줄 누군가를 찾지 못해, 누군가를 믿지 못해 내가 키운 것이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만 내 앞에 두 아이가 배우고 싶고, 공부하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지지해 줄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