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델리러브 Nov 18. 2024

2. 수행자 그리고 AI로봇의 기쁨과 슬픔

주방이모가 할만하냐고 물었다. 일에 대해 이제 이해가 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질문을 이해하기 좀 어려웠다. 할만해요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아직 모르겠어요라고 답하기도 애매했다.




" 그냥 하는 거죠 뭐"




맞다. 나는 진짜 그냥 하는 거다. 입을 다물고 일만 하는 시간을 어쩌면 원했던 건지 모른다. 하지만 힘들다. 허리가 쑤시고, 다리는 후들댄다. 돈을 버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한때 나는 프리랜서였다. 여러 일을 한 번에 할 수도 있다. 정규직인 적은 없지만, 정규직처럼 미친 듯이 일했다. 이후 비정기적인 일을 하다가 식당 서빙일을 했다. 그곳에서는 4대 보험이 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주휴수당도 나왔다. 그런데 이번 일을 좀 다르다. 식당주인 딸이 내게 말했다.




"주급 괜찮죠? 일용직으로 신고해도 되죠?"



나는 현재 일용직 노동자이다. 단 3시간만 인간이 아닌 로봇이 되는 일. 존중이란 없다. 다들 자기 일에 바쁘다. 주방에서 존재란 없다. 일하는 기계만이 작동하면 된다. 묵묵히 일만 한다. 그런데 식당 주인인 다른건 아끼라는 말 안하는데 물만 아껴달라고 했다. 자기 사정이 있다고 한다. 무슨 사정인진 모른다. 그래서인지 식기세척기에서 나오는 허드렛물도 허투로 쓰지 않는다. 걸레를 빨거나 바닥 청소를 할 때 쓴다. 그냥 밖으로 나가는 물이 없다. 그 물들은 또 다른 과정을 통해 다른 용도로 쓰인 후 하수구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밥값은 7천 원이다. 회사에서 결제해서 먹을 경우 6천600원 정도이다. 식판을 하루에  몇 개를 닦을까. 보통 200명이 온다고 한다. 6천600원으로 계산하면 하루 백 3십2만 원이 나온다. 싼 맛에 오는 어르신들도 많다. 대략 하루 백 40만 원을 번다는 거다. 반찬도 별개 없다. 서버도 필요 없다. 주방이모와 악던주인모녀 세 명이 일하는데 매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3~4일만 나오면 되는 주방보조, 즉 설거지보조만 쓴다. 인건비도 얼마 들지 않는다. 이들은 남는 장사임이 분명하다. 싸구려 식재료로 만든 음식들이니까. 일이 고돼도 어차피 모녀가 힘든 건 아니다. 그들은 할만하다. 그만큼 대가를 받고 있으니까. 나는 그냥 일용직이니까 없는 사람척 일만 하면 된다.




문제는 주인사장의 요구 사항이 많다는 것. 하지만 도통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뭐라 뭐라 얘기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말이 웅얼거린다는 것에 포인트를 뒀다. 딸은 내뱉는 발성이다. 천하를 호령할 호랑이 같은 여인. 억새도 이보다 더 억셀 수 없다. 억세고 독해서 한 번 문 돈은 다시 내뱉지 않을 근성이 보인다. 돈을 벌려면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이란 나처럼 물러터져서는 돈 벌어먹기 힘든 것이다. 이토록 나를 자책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노력하지 않았는가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돈을 벌려면 마음을 먹어야 한다. 돈을 벌겠다는 일념 하나로 직진해야 한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온 영혼을 탈탈 털어 일을 했다.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나를 자책했다. 이제 나는 돈이 필요하다. 지금 돈을 벌어야 한 사람은 우리 가족 중에 나밖에 없다. 이걸 이제 깨닫다니. 피아노 배우기니 독서토론모임 이런 게 얼마나 배부른 소리였던가. 나는 그저 지금 서울에 올라와 4명이 아이를 먹여 살기기 위해 한 겨울 산동네 사거리 극장 앞에서 뉴슈가를 듬뿍 넣은 옥수수를 파는 30대의 우리 엄마와 같은 처지이다. 엄마는 그 굴곡진 세월을 버텼다. 그 그늘 아래서 가난했지만 나는 무사히 성장했다. 내 앞의 상황이 지난 과거와 오버랩 돼 목이 매이게 한다.





가장 바쁜 시간은 11시 30분부터 1시 10분까지다. 사람들이 폭풍우처럼 몰아치기 시작하는 시간은 12시부터. 그러니까 12시부터 1시 10분까지는 존재로 살기 힘든 시간이다. 존재란 모름지기 사유를 바탕으로 한 삶을 영유한다는 것.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에게 사유란 없다. 그저 식판 닦는 기계이다. 이런 일은 로봇이 하는 게 맞다. 로봇은 세제냄세에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고, 수량이 많다고 해서 지치지도 않을 것이며, 정해진 속도를 쭉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로봇인척 일할 뿐이다. 그러니 로봇에게 그 어떤 말을 해도 수용하기 힘들다. 로봇에겐 아직 프로그래밍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할머니의 잔소리를 그때그때 업데이트하기엔 애매하다. 로봇은 수행 중에 업데이트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계속 이래라저래라 아껴라 여기다 둬라 지속적으로 얘기한다. 로봇처럼 일한다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가끔 감정이 울컥한다. 감정은 분노로 폭발한다. 어쩌면 조만간 폭발할지 모른다. 나는 로봇이지만 인간이기도 하니까. 반인반수도 아니고 반인반로봇의 삶은 왜 이리 슬픈 걸까.



작가의 이전글 1. 수행자로 살아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