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낭독회에 대한 기억
11월의 반절이 지나갔다. 브런치에 글쓰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본다. 몇 안 되는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내 글도 나처럼 참 건조하고 무겁다는 것이었다. 내 삶에 기대어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술작품,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적 사실과 사상에 기대어 쓰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내 삶이 꽉 차 있을 때는 밥벌이에 바빠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묻혔고 내면이 텅 비고 길을 잃었을 때에야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어떤 교수님이 내 과제를 받고 글에서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고 코멘트를 주신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칭찬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더 명석하고 날카로운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엉성하더라도 살아 있는, 온정이 느껴지는 글을 써내고 싶다. 그것이 갈수록 참 어렵게 느껴진다.
매년 11월, 마음이 스산해지는 이맘때쯤 구들장처럼 내면의 밑바닥을 데워주는 기억이 있다. 시절이 어려울 때마다 굳은 손난로를 꺼내어 잘잘 흔들어서 온기를 느낀 다음, 안심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어놓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해방촌의 한 작은 서점, <고요서사>에서 한강 작가를 만났던 기억이다. 당시 한강 작가가 <노란 무늬 영원>이라는 단편집을 재출간하여 작은 서점에서 낭독회를 가졌고, 나는 냉큼 자리 하나를 선점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런 이벤트를 연 것은, 재미있게도 기존의 책 표지에 삽입된 사진의 저작권 문제 때문이었다. 기존의 사진을 더 이상 책에 싣지 못하게 되자, 이 참에 원래 단편들의 순서도 재배열하고 교정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맨부커상 수상 이후에 매스컴에서도 한참 많이 접하던 시기였고,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 같은 베스트셀러만 몇 권 읽은 차였다. 이미지로만 보았던 작가는 어딘가 병약하고 그 자리를 불편해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서점에 조금 일찍 도착하니 그 하얗고 조그만 공간에 열 개 남짓한 의자들이 열을 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한강 작가가 도착했고, 첫 번째 내가 받은 인상은 위로 솟은 여윈 나무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가 환하게 웃자, 마른 사시나무에 겨울 햇살이 불현듯 찬란하게 쏟아지는 듯했다.
나와 함께 모인 사람들은 거의 10년 이상 한강 작가의 팬이었던 사람들도 많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한강 작가의 책들을 전부 짊어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분은 마치 아이돌 팬이 '시아준수'를 만나러 오는 게 이런 기분일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마지막에 싸인 받는 시간에 커다란 보따리 같은 가방에서 그 책들이 줄줄이 나오는 광경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사람들이 와아-하면서 웃었다.
시간이 되자, 작가가 맨 앞 책상에 앉고 옆에 서점 주인 차경희 대표가 진행을 맡았다. 첫 순서는 <노랑무늬 영원>의 가장 첫 단편인 <밝아지기 전에>를 다 같이 낭독하는 것이었다. 작가가 첫 문장을 시작하고,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는 만큼, 생각하기에 적당한 만큼씩의 문장을 읽었다. 내 순서가 돌아왔을 때 '지글지글 끓는 심장' 부분을 읽게 되었다. 그 순간에 내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고 왠지 모르게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입 주변에도 열기가 가득하여 볼이 상기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학교 수업에 교과서를 읽듯이 또박또박 읽거나, 대사에서는 약간의 연기를 가미하거나, 떨리는 목소리로 읽거나, 가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들이 이 문장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고 있는지가 내게 전해져 왔다. 세 번째 나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이런 구절을 읽었다. "젊었을 적 엄마를 닮은 여자가 있어. 곱고 몸피가 작고 웃음이 선한 여자. (중략) 그렇게 다정하게 나를 맞아준 여자가, 왜 이렇게 무서운 방으로 안내했을까. 떨면서 난 중얼거려. 밝는 대로 떠나야지. 여기 이대로 서 있다가, 밝는 대로 몰래 떠나야지."
그리고 <소년이 온다>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다음의 문장이 지나갔다. "하루에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한 걸었던 그 길가에 흰 질경이 꽃이 핀다. 여린 잎들이 버드나무에 돋아난다. 어지러운 햇빛이 돌아온다. 희거나 목이 길거나 부리가 노란 새들이 온다. 생명이 온다."
어느덧 낭독은 끝을 향해갔고, 가장 뒤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 앞에서 그쳤을 때,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예감이 들었다. 다음으로 한강 작가가 자신이 쓴 마지막 문단을 읽었다. 낭독이 끝났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함께 앉은 이들이 만들어낸 감정의 물결은 다같이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그것이 인생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완벽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작가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내밀한 이야기도 했다(여기서는 일부러 적지 않으려고 한다. 그 뒤에 다른 낭독회에서 작가의 발언이 기사로 나가서 고요서사에서 기자에게 강하게 항의한 해프닝도 있었다.) 사람들도 본인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 낭독회에 오기 위해 강릉에서부터 발걸음을 한 사람도 있었고, 머리맡에 늘 <희랍어 시간>을 두고 한 구절씩 읽고 자는 열혈 독자도 있었으며, '독자들은 실재하는구나!' 라고 실감한 책 편집자도 있었다.
나는 당시 을지로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인생의 1/3을 지하철에서 보낸다는 경기도 출퇴근자였다. 출근 시간에 달리는 지하철에서 읽는 책 읽는 시간은 갯벌에 뚫린 숨구멍 같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어딘가가 늘 답답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글을 써야할 것은 같지만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날 해방촌에서 어디론가 사라진 높고 아름다운 세계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듯했다. 생계를 잠시 포기하고 완전히 창작에 전념할 만큼의 용기도 없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고독을 달래기 위해 쓰는 글은 의미 있는가? 과거 중2병에 걸린 나는 생활의 기록을 남기면서도 늘 죽기 전에 이것들은 꼭 불태우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는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이렇게 시시한 글을 남기고 죽는 게 무서웠다. 내가 남기는 것은 어떤 완결을 가진 멋진 것이어만 했고, 그것은 결국 재능이 없다는 선고를 받기 싫은 마음이었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런 심정을 나름대로 절절하게 담아서 사전 QnA 질문으로 보냈다. 작가는 잠깐의 침묵 후에 답을 주었다. 그것은 아주 명료했다. 모든 글은 의미가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쇼핑할 때 하나씩 지워가는 리스트를 빼고 모든 글은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어떤 순간에 글을 쓴다. 죽기 전에는 유서를 쓰듯이... 어떤 직함을 갖고 쓰는 글이 아니어도, 글을 쓴다는 행위는 무엇을 치유해줄 수는 없지만ㅡ있기도 할 테지만ㅡ 글을 쓰는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후로 이 말을 늘 붙잡고 산다.
나는 그 뒤로 회사를 그만두고 또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밝아지기 전에>에 나오는 그 꿈이 생각났다. 여행지에 막 도착해서 짐을 풀고 이제는 나가서 무엇이라도 해야 될 텐데, 시간이 이렇게 가고 있는데, 3시가 훌쩍 넘어서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늘 이렇게 준비만 하다가 모든 게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요즘은 겨울이라 5시면 해가 지는데...
'현재의 순간을 쥐고 으스러뜨리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예쁜 단풍을 보면서도 불안했고, 가족들과 '불금'을 보내면서도 정신은 어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현재를 쥐고 스스로 으스러지지 않으려면 글을 써야 했다. 글쓰기가 나를 강하게 만들어줄 거란 그 말 하나를 붙들고서. 출퇴근할 때 한강을 건너며 책 위로 햇빛이 쏟아지는 그 순간이 가장 충일한 순간이었다면, 이제 공부를 끝내고 타자 앞에 앉았을 때가 그렇다. 글을 쓸 때면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되고, 별다른 잡념이 들지 않는다.
가끔 서로를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이 곳에서 나도 플랫폼님의 허락을 받았으니 작가인가? 어딘가에 기대서야 겨우 글을 쓰는 내가? 이렇게 너도나도 작가님이라면 작가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2년 전에 보았던, 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작가는 그토록 특별한 아우라를 지녔고, 지금도 나는 그 때의 공기와 대화를 간직하고 사는데. 어느 순간에 그런 질투심, 자조와 냉소 때문에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자 글을 쓰고 찢기를 반복하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다가 결국 쓰지 않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어떤 대단한 것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높고 아름다운 세계에서 온 예술작품과 잘 짜인 역사적 사실의 조합, 이런 것들로 빵 굽듯이 글을 한 판 뚝딱 써내고 나면 왠지 스스로가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싶어서라도 쓸 것이다. 나는 그래도 나쁘지 않은 동네 제빵사라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내 빵은 나쁘지 않다?). 아니라면 깊숙히 넣어 놓았던 어떤 기억을 흔들어 깨우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스스로에게 가끔씩 숨통을 틔어주는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 글을 열심히 연습해서 어느 날 내 글이 지면에 실린다면... 이런 미래 포르노를 오늘도 구겨버릴 망정 차마 버리지 못하면서.
그날 해방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참 추웠다. 감각들이 살아나고 마음이 뜨거워진 채여서 더더욱 추위가 매섭게 느껴졌으리라. 그럼에도 온몸의 감각을 쫑긋 세우고 있으니 아파트가 아니라 주택들이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의 소리가 잘 들렸다. 한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아빠에요~"하고 조용히 부르자 어떤 집의 대문이 달칵 열렸다. 벨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단순하고 아름다운 그 한 문장만으로 문이 열리는 것이 그 날따라 경이로웠다. 골목길에서 어떤 꼬마 여자아이가 "난 나중에 돈을 많이 벌 거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그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어떤 면모가 그들의 두 대사로 드러났고, 문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암호 수수께끼 같은 그 문장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떤 힌트도 갖지 못한 채로 서랍 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2018년 11월 27일의 경험 / 2020년 11월 14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