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디스크에 대한 소고
많은 이들이 몸의 병, 마음의 병, 그리고 극복한 과정, 극복하고 있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곳이 가끔은 거대한 심리 상담센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각자를 비추는 커다란 거울이 스스로의 심리 상담사와 치유사가 되어 준다.
나는 3.5kg의 건강한 신생아로 태어난 이래로 작은 소화불량 빼고는 큰 병을 앓아본 적이 없다. 아, 한번은 폐렴이 낫지 않아 임상 약을 써서 목숨을 구한 적은 있긴 하다. 아무튼 생활의 지장을 줄 정도의 고통을 느낀 적은 딱 한번 있다. 바로 만성 허리 디스크였다. 어떤 병은 운명적인 선고처럼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오기도 한다. 아니라면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몸이 보내는 이상 신호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내 질환은 어이없게도 걸리게 된 명백한 원인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확실했다. 웃지 않고 정색하고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온 병이었다.
2016년 추운 겨울, 광화문 집회의 100만 인파 속에 낑겨서 찬 바닥에 앉아있다가 그만 4,5번 척추 디스크가 나가버린 것이다.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를 목청껏 부르던 그때 내 디스크도 신나게 이탈 중이었다. 주말 집회에 나간다고 하니 아버지는 취업 준비생인 주제에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라고 충고하셨다. 아마 당신의 대학 시절이 겹쳐서 그러셨던 것 같다. 사회 참여, 그 연대의 축제 같은 시간이 끝나도 니 먹고살 길은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결국 허리까지 나가서 돌아오다니. 산재도 아니고 '사회 재해'라는 항목으로 보상금을 청구할 수도 없었다. 당시 정권자들과 시국을 이런 개인적인 감정도 섞어서 비난했다.
탄핵이 선고되는 역사적인 장면을 생중계로 보았고, 그 이후에는 대선으로 분주하다가 다시 원래의 일상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리고 나에게 남겨진 것은 영광스러운 디스크뿐이었다. 정형외과에서 디스크 부분이 원래 말랑말랑하고 하얀데 CT 사진을 보면 새카맸다. 거의 4,50대 수준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수술은 웬만하면 하지 말라고 해서, 도수치료를 받고 약을 먹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픈 것은 특히 밤에 심해졌는데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어서 거의 굴러 떨어진 다음, 침대 위로 엎드려 허리를 반 꺾고 있으면 잠깐이나마 아픔이 덜했다.
내가 10살도 안 된 어릴 적에, 가족끼리 강원도로 여행 간 적이 있다. 친척분이 소개해주신 어떤 신부님이(우리 집과 종교는 다르다) 홀로 산 근처 사제관에서 지내고 계셨다. 아마 치악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부님이랑 등산을 했는데 나무가 울창해서 한 여름인데도 하나도 덥지 않았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내려오는 길에 다 같이 막걸리랑 전을 먹었다. 아주머니들이 나를 위해 특별히 떡볶이를 해주셨는데 참 맛있었다.
신부님은 원래 허리디스크가 심하셨다. 그런데 수술을 하지 않고, 그저 두 발을 똑바로 향하게 하고 허리를 곧게 핀 채로 산을 걸어 다니기만 했는데도 허리가 좋아졌다고 했다. 그분의 사제관에서 빌헬름 켐프의 베토벤 소나타 LP를 들으면서 얘기를 들었다. 고요하고 걱정 없는 시간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나도 별 수 없이 똑바로 걷기만 했다. 덜 앉아있거나 누워있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복대를 차고 하염없이 천변을 걸었다. 이 질환은 굉장히 신기하다. 똑바른 자세로 걷고 걷기만 하면 믿을 수 없게도, 상태가 조금씩 나아졌다. 디스크가 신경을 찌르는 고통도 조금씩 사라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특히 가족에게) 부리는 짜증도 감소했다. 그 해 3월 나는 어떤 곳에서 인턴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걷기가 아니라 달리기의 시즌이 왔다. 열심히 일했고, 벌었고, 디스크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달리다가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서 앞으로 엎친 때가 왔다. 덮친 격으로 코로나로 인해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집에 있게 되니 한동안 영화를 미친 듯이 보고 책도 미친 듯이 읽었다. 동굴 속 짐승처럼 수그리게 되던 나날들... 또 허리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가 아플 때마다 노년의 나를 생각하게 된다. 지하철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갔을 때, - 나는 성격이 급해서 원래 2,3 계단씩 건너뛰며 내려가기도 한다 - 옆 걸음으로 한 계단씩 내려가던 할머님들을 생각하게 된다. 버스에서 카드 찍고, 높은 계단을 가볍게 콩콩 뛰어내리지도 못한다. 아주 느리고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딛을 때, 또 그들을 생각한다. 한국인 특유의 빠른 습성과 눈치에 익숙한지라 나도 모르게 버스기사님과 주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내렸다.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전전긍긍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농사일을 오래 하셔서 허리가 앞으로 굽으신 분들의 허리를 가만히 지켜보게 된다.
허리가 아프면 직립보행을 못하고, 나도 모르게 허리를 약간 숙여서 어정어정 걷게 된다. (집에선 왜 또 '할머니 자세'로 걷냐고 한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 자세로 인해 누군가를 만나러 나갈 때 약간 주눅 드는 마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내가 '쭈구리'처럼 보일까 봐? 아니면 같이 즐겁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일어서려고 했을 때 으악! 하면서 주저앉아서 못 일어나는 상황이 두렵기 때문일까. 나는 얼마나 당황할 것이며 상대방은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내 자세는 어딘가에 처박히고 수그리고 있던 나의 마음을 반영했고, 무기력한 노년을 맞은 나 자신에 대한 상상을 끝도 없이 자극했다.
엄마는 나에게 허리 마사지를 해주면서 입버릇처럼 '너 나중에 그러다 애기도 못 낳는다'라고 말했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허리 마사지가 시원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지인 중 출산을 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친 아주머니가 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예쁜 아기를 안아주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혼을 하셨다. 나는 디스크-출산-이혼으로 이어지는 테크트리가 당최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디스크는 무력감, 우울, 퇴화라는 단어를 연상했고, 지금으로선 내가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도 정해지지 않은 어떤 보통의 가정을 파괴하는 단초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별 수 있겠는가. 발을 가지런히 하고 걷고 또 걸으니 조금은 나아진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나는 또 화면 앞에 웅크려 이 글을 쓸 수 있다. 한편으로 나는 허리 건강 전도사가 되어서 주변에 똑바로 앉고 걸으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되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항상 허리를 똑바로 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지금 내 상태는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무기력하게 은둔할 때뿐 아니라 어딘가에 집중하고 몰두할 때도 우리는 자세를 웅크린다
나는 글렌 굴드의 피아노 치는 자세를, 토니 타키타니가 작업장에서 몸을 구부정하게 수그린 자세를 떠올린다. 어떨 때는 <인 디 아일>에서 쓰레기통에 허리를 숙이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떠오른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예술로, 일로 침잠하는 사람들.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사람들. 모든 고독한 사람들의 직립보행 진화 과정이 역으로 퇴화하는 상상을 한다. 퇴화를 막기 위해 우리는 또 앞으로 나아가고, 또 멈춰 서고. 그것들을 영겁처럼 반복하는 상상을 한다.
이미지 출처
https://www.newsnack.co.kr/lets-be-really-good-working-with-grandmothers-before-and-after-100-years-of-age-rex/
https://www.uv.es/jgpausas/he.htm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02849
https://www.wsj.com/articles/hearing-glenn-gould-play-goldberg-variations-anew-1506962736
https://www.insight.co.kr/news/302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