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개들에게
나는 12월 부로 반려견과 관련된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거의 1년에 가까운 긴 공백기를 끝냈다. 사실 올해 초에는 아주 화려한 백수 생활을 꿈꾸며 다니던 직장을 퇴사했다. 그러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바이러스의 직격탄을 제대로 맞았다. 이렇게 최악의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당연히 몰랐다. 원래는 외국에 가서 어떤 연수를 들으려고 했는데(= 오래 제대로 놀기 위한 핑계) 그것이 취소됨은 물론이고 어디도 여행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에서 푹 쉬게 되었다. 백수생활에 잘 적응해서 하마터면 영원히 쭉 쉴 뻔했다. 전염병 때문에 생활 반경은 집 근처를 벗어날 수 없었고, 개를 산책시키는 시간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올 3월, 부모님을 모시고 애니메이션 <환상의 마로나>를 보러 갔다. 강아지를 좋아하기로 잘 알려져 있고, 내가 개인적인 팬이기도 한 김혜리 평론가가 극찬한 영화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우리 개를 거의 둘째 아들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5분쯤인가, 머리털 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주인공 캐릭터를 보자마자 내가 기른 첫 번째 개가 생각났다. 마로나처럼 깡총하게 선 두 귀와 잔털들, 학교 앞 쓰레기장 앞에 쓰러져 있던 마지막 모습도... 그 개는 내가 산책하다가 미숙하게 잃어버려서 불과 1살 조금 넘었을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빛나는 은빛 털을 가지고 있고, 성격이 참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나는 몇 년간 한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지은 마음을 안고 살았었다.
이야기는 마로나가 묶여있던 목줄을 풀고 솔랑주를 뒤따라가다가 사고를 당하고, 자신의 한 생을 돌아보며 과거의 시점으로 이동하는 구성이다. 벨기에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브레흐트 에번스의 강아지와 인간 캐릭터 디자인이 하나하나 재치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특히 강아지의 시선으로 본 인간 삶의 스펙트럼이 환상적인 그림체로 펼쳐질 때, 강아지의 시선에서 무시무시한 인간 세계를 보는 것마냥 아득해졌다. 갓난 강아지일 때 엄마 개의 젖을 먹던 평온함, 첫 번째 주인이자 첫사랑인 마놀을 만났을 때의 황홀감, 그와 함께 우주로 상승하며 곡예하는 모습과 같은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 반면 불행의 냄새를 맡는 것, 기계적이고 각진 인간들의 세계, 낮과 밤으로 달라지는 다정함과 폭력, 인간의 허위와 위선적인 면모, 한 인간의 성장기(솔랑주) 그리고 죽음(할아버지)과 같은 어둡고 슬픈 순간도 있었다. 특히 인간의 죽음을 묘사한 상상력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지의 향연과 함께, 나의 두 개들과의 좋은 추억과 그들에 대한 고마움, 애틋함이 마로나의 행복 박스처럼 뒤섞여서 슬픔인지 행복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나의 첫 번째 개를 마음속에 묻어 주고, 몇 년 간 끝내지 못한 애도를 마쳤다고 생각된 것은 영화가 끝날 무렵이었다. 그렇다고 후련하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전에는 잘 쳐다볼 수 없던 그 강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잘 있지? 미안하고 고마웠어. 네가 참 보고 싶었어. 우리 곧 또 보자.' 하며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 지금 키우고 있는 나의 개를 떠올린다. 개들의 수명은 최소 10년에서 20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리고 프리랜서가 아니라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이라면 사실 살면서 강아지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정작 강아지와 하루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자, 개가 내 삶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 과연 맞는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게 내게 주어진 주요 일과라는 사실이 자존심 상하기에 이르렀다. 또, 내가 이렇게 개 돌보기에 과몰입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에 '취준'이나 자기 계발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며.. 그러나 인간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개는 항상 똑같은 온도로 나를 맞았고, 내 옆에서 잠을 잤다.
감독이 정말 강아지를 사랑하고 잘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 것은 개들의 심리에 대한 탁월한 묘사를 볼 때였다. 우리 집 개는 왕실 근위병처럼 창문 밖을 거의 몇 십분 동안 근엄한 태도로 지키고 있을 때가 종종 있다. 들고양이나 낯선 차가 오면 가끔 짖기도 한다. 마치 자신에게는 우리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듯이 말이다. 감독의 관점에 따르면,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는 느낌, 매일 자신이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이 강아지의 삶의 만족감을 이루는 요소다. 마로나는 자신이 주인의 삶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랑하는 그를 떠나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강아지에게 주체성을 담담하게 부여한 것마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에 마로나가 솔랑주를 따라가는 장면은, 우리가 아무리 사랑한들 강아지가 주는 사랑에 미치지 못하며, 그 간극을 마지막 장면이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면 조금은 아득하니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것은 개들이 갖고 있는 천성과 하늘이 부여한 타고난 품위를 말해줄 뿐, 인간인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리라. 사람들은 원을 그리듯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해하고, 개는 그것을 행복으로 느낀다. 인간은 갈등과 성장을 필요로 하며 인생의 시간은 직선으로 나아가는 반면, 개는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면서 원형의 시간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레닌의 미소'에 나오는 밀란 쿤데라의 설명이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나의 필명은 테레자와 토마시가 키우는 카레닌이라는 개의 이름에서 왔다.
결국 나는 우리 집 개와 집에서 보내는 반복되는 일상을 못 견디고 다시 직선의 삶에 뛰어들었다. 새로운 회사는 매일같이 정신없는 변화를 겪고 있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많은 강아지들의 사진을 받고 그들의 사연을 듣는다. 여기에는 보호자들의 인격과 개성이 자연히 드러나고, 그것을 보는 재미도 있다. 내 지인들은 '덕업 일치'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나에게는 상당히 즐거운 일이고, 일이 즐겁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어쩌면 내 삶은 삶대로 나아가면서도 늘 나의 개와 닿아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찾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얼른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만은 강아지와 햇살을 맞으며 여유롭게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올해는 산책을 많이 하면서 유독 사계절의 풍경과 냄새를 자세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우리는 함께 눈밭을 거닐게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개들이 인간들로 인해 필요 없이 아프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간 곁에서 충분한 행복을 누리며 살다 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으며, 글을 마친다.
[Eurofilm 7. 루마니아, 프랑스, 벨기에]
<이미지 출처>
https://kaist455.com/2020/07/08/maronas-fantastic-tale-2019/
https://apartefilm.net/2020/05/22/new-trailer-for-animated-maronas-fantastic-tale-about-a-stray-dog/
2020년 3월 감상 / 2020년 6월 25일 첫 감상 씀 / 2020년 12월 20일 다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