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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ine Jan 03. 2021

크리스티안 펫졸드, 트랜짓 (2018)

선생님, 여기가 지옥이에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트랜짓>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카프카가 쓴 카사블랑카'라고 극찬을 받는 이 영화가 왜 카프카의 소설을 닮아 있는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카프카의 1919년작 단편집 중 <법 앞에서>에 나오는 문지기의 일화를 소개한다. 이는 <소송>의 제9장 <대성당에서>에도 삽입된 바 있다.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그에게 입장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시골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후에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가능한 일이지>하고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돼.>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 열려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났기 때문에 시골 사람은 몸을 굽혀 문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문지기가 그것을 보고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겨서라도 들어가 보시지. 그러나 알아두게. 나는 힘이 장사지. 그래도 나는 가장 낮은 문지기에 불과하다네.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하나씩 서 있는데, 갈수록 더 힘이 센 문지기가 서있다네.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만 보아도 나조차도 견딜 수 없네.

(중략)
문지기가 그에게 걸상을 주며 문 옆쪽에 앉게 한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그는 입장을 허락받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자주 부탁을 하여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가끔 심문을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나 건네는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마지막엔 언제나 그에게 아직 들여보내 줄 수 없노라고 문지기는 말한다.
(중략)

이제 그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죽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세월의 온갖 경험들이 그가 여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보지 못한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된다(...) <또 무얼 알고 싶은 건가?>라고 문지기가 묻는다. <끈질기기도 하군.><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법을 절실히 바랍니다.> 시골 남자가 말한다. <지난 수년 동안 저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런 건가요?> 문지기는 시골사람이 이미 임종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고, 희미해져 가는 그의 청각에 들리도록 고함을 친다. <이곳에서는 자네 이외에는 아무도 허락받을 수가 없네.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자네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이제 문을 닫아야겠네. >

법의 문턱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문지기의 결백함을 놓고 소설 속에서 토론이 벌어진다. 이 우화를 얘기해준 성직자는 문지기를 변론한다. 문지기에게는 법을 비판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 충실했다. 그는 시골 사람을 내치지 않고 온정마저 베풀었으며 '무엇인가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뇌물도 받아주었다. 그렇게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어떤 단순성, 그리고 순일함마저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모든 걸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그것을 단지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카프카의 문지기 일화에 대한 논의만으로도 한나절을 보내야 되겠지만 잠시 접어두고, 영화 <트랜짓>을 보면서 즉시 이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 날 내게 배정된 문지기들이 잠시 오해해서, 혹은 연속적인 우연들이 절묘하게 들어맞아서, 어떤 계시나 합당한 이유로든 그들이 오직 내게만 문을 열어준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당한 내 몫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에 베풀어진 구원이었다면?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짜 창조주의 장난이었다면? <트랜짓>에서 우리는 카프카적인 역설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와 여정을 따라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에서 나온 일화를 듣고 비교해보자.


한 남자가 죽었어요. 지옥행이 결정되었지요. 그는 큰 문 앞에서 기다렸어요.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1년, 2년, 마침내 누가 지나갔어요.
남자는 말을 걸었어요. 절 좀 도와주세요. 지옥에 가기로 되어있거든요.
그 사람은 남자를 훑어보더니 말해요.

선생님, 여기가 지옥이에요.


3명의 문지기

1940년 2차 대전 시기, 나치의 점령과 '봄맞이 대청소'가 시작되기 직전의 프랑스에는 거대한 전운이 감돌고 있다. 파시스트에게 쫓기고 있는 TV와 라디오 수선공인 게오르그(프란츠 로고브스키)는 독일의 반체제 작가 바이델에게 아내 마리(폴라 비어)의 편지와 멕시코 영사관의 초청 편지를 전달하고 사례금을 받는 일에 자원한다.


이 일은 원래 바이델의 출판사 친구가 전달해야 했지만, 그는 호텔 주인에게 발각될 위험을 걱정하여 일종의 위험수당을 주고 게오르그에게 부탁한다. 그는 애초부터 한번 대체된 전령이다. 그러나 바이델은 이미 호텔에서 목숨을 끊은 상태였으며 수신처를 찾지 못한 게오르그는 바이델의 유고를 들고, 하인츠라는 남자와 함께 남부 마르세유로 탈출한다.


이때 동행하던 하인츠마저도 목숨을 잃으면서 게오르그는 그의 아내와 아들인, 멜리사(마리엄 자리)와 드리스(릴린 바트만)에게 비극적인 소식을 전달한다. 그저 소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려 하였지만, 그는 어느 순간 부재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자리에 이끌리듯 머문다.


한편 바이델에게 가려던 메시지들의 최종 수신처가 사라지면서, 게오르그는 꿈쩍도 않을 것 같던 드높은 법이라는 문이 자신에게 뜻하지 않게 열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몇 날 며칠을 대기선에 앉아서 온갖 자신을 증명하는 서류를 들고 장광설로 무료함을 달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바이델'이라는 이름은 마치 천국으로 가는 열쇠인 것마냥 작동한다.


1차 문지기는 그에게 신원 체크 조차 안 하고 문을 열어주며, 2차 문지기는 아주 간단한 테스트만으로 그를 통과시킨다. 1) 아내의 이름은 무엇인가? 2) 떠난 자와 남겨진 자, 누가 먼저 잊을 것인가? 2차 문지기는 아주 심오한 진실에 이르는 대답을 그에게 갈망하는 눈빛이다. 그러나 이 순일한 시골 사람은 '나는 아내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실도 거짓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내놓는다.


다음으로 이제 미국 영사관에서 만만찮은 3번째 문지기가 게오르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좀 더 까다로운 질문들을 쏟아낸다 1) (다른 동료는 다 했는데) 왜 미국 비자를 신청 안 했나. 비자를 못 받을까 봐 두려웠나? 2) 뉴프론티어라는 공산주의 신문에 기고했나?(사상검증) 3) 왜 멕시코인가? 4) 앞으로 무얼 하면서 살 생각인가? 5) 왜 여기 일을 글로 남기려 하지 않는가? 그는 수용소, 탈출, 죽음, 전쟁을 글짓기 소재로 전락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작가로서 중대한 고백(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함으로써 그를 감동시킨다. 마지막에는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게오르그를 의심하는 그는, 작가가 맞는지 최후의 테스트를 던지고, 게오르그는 마치 연극의 대사를 읊듯 바이델이 쓴 소설의 도입부를 말한다.


문지기의 물음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이델이 절대자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왜 도망치려 하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작가가 아닌 삶은 무엇인가? 무엇을 쓰고 쓰지 말아야 하는가? 무엇이 당신을 작가로 만드는가? 이러한 심오한 질문들은, 오직 탈출과 생존만이 목표인 한 시골 사람의 임기응변만으로 나름대로 훌륭하게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이런 심오한 질문을 남에게 무책임하게 던져놓기만 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 영화의 경우 게오르그를 통해 최소한의 대답을, 아니 심지어 훌륭하게 내놓았으니 할 말은 없었다(...))


그런데 작가를 전혀 모르기도 하고 노동자의 삶을 살아온 게오르그의 대답은 '먹고사는 게 중허지 뭣이 중헌디' 식의 대답도 아니었고, 시골 사람이 돌연 작가의 고결한 정신을 탑재한 채로 일장연설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대답은 단지 수용소, 탈출, 전쟁, 죽음을 소재로 학교식 글쓰기는 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작가가 인류의 비극을 기생충처럼 빨아먹지 않겠다는 선포였다. 영화는 어쩌면 '초중생도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위와 같은 질문을 우리가 죽는 날까지 스스로 되묻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답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듯했다.


남겨진 자에서 떠나는 자로 

그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일생일대의 심판을 받고 있을 때, 연옥에 홀로 남겨져야 하는 드리스는 이를 직감한다. 그가 얼마나 애타게 오랫동안 게오르그를 기다렸는지, 드리스의 시간은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 속 선데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린다. 아이가 아프고 독일인 의사 리처드를 불렀을 때에야 게오르그는 자신이 아이를 많이 사랑하고 있었으며, 아이의 마음속에도 자신의 자리가 생겨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위치 상으로도 그가 하인츠의 자리를 대신한다 한들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도 그제야 깨닫는다. 부재하는 아버지와 남편의 자리를 그가 몸에 꼭 맞는 옷처럼 대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으로 드러나는 진실은 이러한 것이다. 함께 천국으로 가지 못할 바에야 같이 연옥에 머물기를, 그리하여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각오하며 그의 곁에 남을 정도로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오르그는 자신이 아이에게 보낸 수많은 신호들(축구해주기, 축구공 사주기, 라디오 고쳐주기, 노래 불러주기...)은 무시하는 채로, 단지 자신이 드리스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무심히 뒤돌아 떠나는 자신이 용서될 수 있다고 변명한다. 이것은 단지 떠날 수 있는 그를 부러워하는 리처드나, 말없이 그를 원망하는 멜리사에게 변명처럼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온 청중, 그리고 알 수 없는 심판관에게 양해를 구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영화는 한 사람의 일생에서도, 그리고 타인과 타인의 관계 사이에서도 떠나는 자와 남겨지는 자의 관계를 끊임없이 도치하며 인생의 아이러니를 반복하는 여러 동심원을 그린다. 남겨진 게오르그에서 떠나는 게오르그, 그리고 다시 남는 게오르그로, 남겨진 소년에서 떠나버린 소년으로, 바이델을 떠난 마리에서 먼저 떠나버린 바이델에게 남겨진 마리에게로.


떠나온 자는 쉽사리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까? 남겨진 자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될 것인가? 폭력과 혼돈이 난무하는 연옥 안에서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의 권력은 자꾸만 허물어진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도망친 아비와 어미는 늘 그들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밤중에 몰래 찾아오지만, 이 영화에서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남겨짐의 관계, 그리움의 관계는 언제고 전복될 수 있다. 아이는 한차례 열병(사실은 천식)을 앓고 회복하면서 씩씩하게 자랄 것이고, 어쩌면 나중에 그의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마리가 말했듯이, 남겨진 자들에게는 슬픈 노래와 동정 어린 눈길이 있지만, 떠난 자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연옥의 비유 

모두가 꿈꾸는 사이 생각은 방황하고 이야기는 스스로 짜이네


사실 주인공의 나름대로 애틋한 사랑 이야기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사관에서 만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영사관 대기줄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마치 부조리극의 대사를 연상시키며, 이 인물들 전체가 작가의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심증을 굳힌다. 우리는 아주 슬프고도 부조리한 이유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미국인의 개 2마리를 데리고 있으면 그들이 보증을 서서 통과비자를 받을 수가 있는데, 동물 검역증이며 모든 서류를 갖추는 동안 돈이 떨어져 버린다. 그녀는 수시로 게오르그를 찾아와서 얼굴을 비추고 힘이 있어 보이는 그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하지만, 결국에 개들은 죽고 만다. 이것이 삶과 죽음을 선택함에 있어서 어떤 결정적인 트리거가 된다. 그렇게 혐오하던 개 2마리에 스스로의 운명이 달려 있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사연인가?

한 가지 더 작가가 시니컬하게 비튼 것은 이 세계에선 미국인의 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유명 지휘자였다는 사실 자체만큼이나 희망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여인은 쓰러진 사람을 응급처치할 정도로 침착하고 어떤 직업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테지만, 그가 가진 인격이나 자격 증명서는 하나 같이 무쓸모의 존재다. 이들의 삶이 담긴 진짜 증명서는 게오르그가 어설프게 떼어 붙이고 펜으로 덧그려놓은 가짜 신분증에 비할 바 못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난민의 삶이 완벽히 이들의 삶과 닮아있다는 현실을 겨냥한다. 어떤 이들은 페이퍼의 무한 굴레 속에서 지쳐서, 다른 이들은 법의 문턱에 가로막혀서 좌절하며, 또 다른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 도태되고 낙오하면서 이민이라는 바늘구멍 통과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마치 피레네 산맥을 맨몸으로 넘는다는 발상이 한니발의 전설과 같은 미친 짓으로 여겨지 듯이, 오늘날도 수많은 이들이 지중해 바다를 건너고 풍랑에 휩싸여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사랑하기 때문에

게오르그는 남편이 지나간 자리를 찾아다니는 마리와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으며 그 시선 속에서 그녀에게 여러 번 사랑에 빠진다. 가짜 창조주의 시나리오 대로라면 게오르그는 마리에게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곁에는 리처드라는 연인이 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한 의사이지만 헌신적인 연인은 되지 못하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낀다. 사심을 품은 게오르그는 마리를 떠나버리려는 리처드의 비겁한 변명을 들어주고 아마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대화는 겉으로 보기에 대단한 직업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리처드가 마리를 두고 떠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진실은 리처드의 얼굴 표정 어딘가에 담겨있다. 게오르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니 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시겠죠'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게오르그는 마리 앞에서 (요때다 하고) 게오르그가 드리스를 버리고 떠나는 것을 고자질하는데, 실상은 너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고 남은 것은 씁쓸한 눈물뿐이다.


리처드를 쉽게 '처치한' 게오르그에게 진정 처치될 수 없는 것은 작가 바이델의 유령이다. 사실은 마리가 배웅한 것이 아니라 배웅받은 것임을, 마리는 남겨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리처드를 보내버린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게오르그는 무척 혼란에 빠진다. 유령 도시에서 술래잡기하듯이 마지막까지 서로를 쫓고 쫓기던 그들은 결국 완전한 합일을 이루어 천국행 배의 승선표를 같이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디까지 뒤집히는 것일까? 사실 마리를 추동한 원인은 바이델이 몬트리올호에 탄다는 사실이었고, 게오르그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져서 그만 자신의 자리를 리처드에게 '양보'하고 만다.


게오르그가 마리에게 진실을 밝히지 못한 이유는, 이제 와서 그의 업보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마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경멸할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배에 올라탄 이상 그 심판대의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또는 마리가 바이델이 아닌 자신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게오르그를 증오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때문이다. 그에겐 이 사랑이 피레네 산맥(적극적인 죽음)을 불사를 만큼 의미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죽음을 넘어선 열렬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인물들의 선택에 깔린 기저에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막을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난민 문제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심경이 그러할 것이고, 그럼에도 남의 불행에는 한쪽 눈을 감으면서 거저 얻은 얄팍한 사랑과 함께 키치한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것. 자신의 비틀린 욕망의 실체를 깨닫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 드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마리의 유령

마리를 보내고 게오르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기로 결심한다. 마지막에 가서야 작가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전혀 관련 없는 관조자의 내레이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영화는 지겹도록 뒤집혀서 이야기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결론적으로 게오르그가 살신성인하면서 선물처럼 준 구원은 마리와 리처드에게는 파멸이었다. 우리가 타인에게 선의로 베푼 행동, 악의로 저지른 행동은 어떻게든 그들의 삶과 맞부딪혀 작용한다.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나의 행동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나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Dieu sait..) 아무리 사고 실험을 끝까지 한들 생각지 못한 변수는 늘 맹수처럼 주변을 도사리고 있다. 이렇다 보니 삶을 살아갈수록 '그때 OO 하길 잘했어' 보다는 'OO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회한이 남는 것도, 난 참 바보처럼 살았다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더 어렸던 시절이나 20대 초에는 지금보다 소위 이타심을 가져야 한다든가, 공명정대해야 된다는 의지가 지금보다 훨씬 충만했던 것 같다. 심지어 의욕적으로 해외에 가서 교육 봉사란 것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준비해 간 선물이며 프로그램이 한바탕의 축제처럼 끝난 후, 현지 소년 소녀들의 텅 빈 눈빛이다. 나는 순간 무언가 대단히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정작 그들은 다 잊었을 수도 있지만, 떠나온 나에게는 그 눈들만이 커다란 잔상으로 떠돌아다녔다. 그때 나는 선의라는 것이 얼마나 멍청하고 이기적일 수 있는가를 깨달은 것 같다. 평생을 이 분야에 헌신하는 분들께 무례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내 경험에서만은 자기만족적인 일회성 선의를 베풀었고, 남겨진 그들에게 상처를 줬을 것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이였다면 난민 문제나, 여러 가지 새로 등장한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지금보다는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는 먹고살기에 급급하여 관성적으로 '뭣이 중헌디!'를 외치고 있는 소시민이 되어가고 있다. 감독이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배경을 21세기로 가져온 것은, 아마도 같은 말을 외치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난민의 처지를 반강제로 체험시키고, 그들의 신발을 억지로 신겨봄으로써 이것 또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충격요법으로 외치고 싶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제 어느덧 마지막 장면이다. 마리가 떠나고 나서도 게오르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환영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어떤 이유에서건 끝내 마리를 떠나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더 사랑한 것은 게오르그였지만, 결국 놓아버린 것도 그였다. 그나마 게오르그에게는 진실이 무엇이든 그 나름대로 숭고한 의지와 이유가 있었으며, 그것을 붙들고 게오르그는 남은 삶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실상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우리는 떠나는 이유에 오만가지 하찮은 이유를 다 붙이면서도, 남겨지는 이유로는 천재지변급이 아니면 어느 하나도 용납하지 못한다. 떠나온 게오르그의 삶은 이제 무한 기다림의 연속으로 바뀐다. 마리가 바이델을 떠난 후에 그를 계속 찾고 살아있다고 믿는 것처럼, 게오르그는 그녀의 운명을 이어받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희망과 절망이 범벅된 게오르그의 눈빛을 비추며 끝이 난다.


마치며

게오르그와 마르세이유 호텔 주인이 주고받는 말장난 같은 대사를 곱씹어 본다. "여기서 머무르려면 더 머무르지 않을 것을 증명해야 한다." 아마도 이 세상에 올 때 필멸성을 전제로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모두는 떠남과 이별을 전제로 잠시 대기실에서 부딪히면서, 외롭지 않기 위해 집단적 독백을 하거나 잠깐 술을 같이 마시거나 밥 한 끼를 얻어먹는다. 그러다가는 어느 순간에 서류는 중요하지 않고, 대기실에서 앉아 나눈 대화가 남긴 기억만이 중요해지리라.


그러고 보니 올해 첫 영화 글이다. 나는 그렇게 길게도 아주 적게도 살지 않은 정말 애매한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정신 연령은 별반 성숙해지지 않은 것 같다. 뭐 예컨대.. 어떤 과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왜 내 인생의 시련은 실연밖에 없느냐고. 로우리스크 로우 리턴의 삶을 착실히 살아왔던지라 웃으며 공감했던 말이다.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가 되어 본 내 순수한 경험은 아직 그뿐이다. 같잖은 이유로 누군가를 차고 차여본 경험.


리처드가 자신이 마리를 떠나는 이유를 의사로서 소명의식으로 자못 진지하게 합리화할 때, 영화의 시니컬한 시선이 그마저도 '같잖은 이유'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느꼈다. 영화가 여러 차례 던지는 질문, "떠나온 자와 남겨진 자, 누가 잊지 못할까?"라는 이 아리송한 문제 앞에서, 게오르그이자, 마리이자, 바이델이자, 감독의 답변은, 그것이 남겨진 자가 아니라 떠나온 자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떠나온 자의 몸은 이국에 와 있더라도, 그들의 혼은 남겨진 자들이 떠났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곳에서 유령처럼 배회한다.


갑작스레 남겨지는 것은 일종의 충격이자 사고이며, 떠남은 차근차근 계획된 것이라 처음엔 충격과 사고가 남겨진 자에게 더 아플 수 있다. 그러나 떠나간 자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때로 그들은 떠나기 이전 상태로 간절히 돌아가고자 한다. 영화는 사랑 관계의 구도를 넘어서서 또 다른 층위에서 떠나온 자들, 즉 난민들의 아픔마저도 함께 끌어안는다. 남은 가족을 다 버리고 생면부지의 땅으로 도망치는 그들의 머릿속은 지옥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역설은, 공평하게 누구도 난민이 될 수 있다. 아니 사실 우리는 모두 난민이기 때문에 인생 앞에 공평하다.


[Eurofilm 8. 독일, 프랑스]

<이미지 출처>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7674800&query=%EC%98%81%ED%99%94%20%ED%8A%B8%EB%9E%9C%EC%A7%93%20%ED%8F%AC%ED%86%A0
https://www.dw.com/en/berlinale-film-transit-brings-world-war-ii-refugees-into-the-present/a-42638772
https://www.filmcomment.com/blog/film-of-the-week-transit/
http://www.afterhoursfilmsociety.com/transit.html
http://www.techholi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460
https://www.nybooks.com/articles/2019/03/07/christian-petzold-waiting-rooms-history/


참고 문헌

1. 소송 | 프란츠 카프카 지음  | 이주동 옮김 | 솔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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