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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말 Sep 12. 2022

굿나잇 레터 #3

전투적으로 살아온 당신에게












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상사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었어.

퇴사 후 근황을 이야기하다 취미생활로 넘어갔고 나는 최근에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다고 말했지.


그러다 푸념하듯 이런 말을 했어.


"피아노를 꾸준히 친지가 18년이 넘었던 시점에 피아노를 팔게 되면서 그 이후로 쉰 지가 8년 정도 됐는데요. 지금 다시 치려니까 멜로디 감각도 그렇고 곡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정말 형편없어져서 당황한 거 있죠. 어이없었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그랬더니 이사님이 웃으면서,

"너는 꼭 매사를 전투적으로 대하더라"


순간 머리가 띵했지.

'전투적?'


"보통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면, '오랜만에 피아노를 쳐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더라.' 또는 '옛날 생각나면서 기분이 좋더라, 그런데 실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좀 씁쓸하기도 했다.' 딱 요정도의 느낌을 말할 것 같은데. 지금 너는 피아노와 싸우다 진 것처럼 말하고 있네."


하긴,

취미로 시작한 피아노인데, 당시 씩씩거리며 말하던 내 모습이 꽤나 당황스러웠어.




생각해보니 그러네.

이제껏 퀘스트를 깨듯, 그날그날 눈앞에 있는 현실을 해치우며 살아온 것 같아.

여기서 무너지면 더 물러설 곳 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어려웠던 가정형편에 굽히기 싫었던 나의 욕심은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나를 극한으로 몰았어. 

벼랑에 발끝이 걸려있는 것처럼. 

떨어질까 봐 온 힘을 발 끝으로 모아 버텼어.


그러다 정말 평범했던 어느 날, 

전투의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장렬히도 아니고 그냥 맥없이 떨어져 버렸어 벼랑에서. 


떨어지는 건 실패와 같다고 생각했기에, 한동안 울적하고 깜깜했어.

'내가 현실에 결국 졌구나' 하면서.


얼마 시간이 지나 천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여기도 그냥 땅이더라? 

던전 같은 곳이 아니라, 또 다른 땅이더라고. 

비록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드니까 그 땅에 길을 만들고 싶어 졌어.

여러 사람들이 걸어 다녀서 매끈해진 길 말고, 울퉁불퉁해도 내가 직접 만든 길.


지금도 그때의 기분이 떠오른다. 호카곶의 벼랑 끝에 서 있던 나. 그건 단순히 벼랑 끝에 선 인간이 아니라, 벼랑 끝까지 간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다. 거기까지 다녀온 사람이야 내가. 그런 용기가 있으면 무너진 나를 언제든 일으켜 세울 수 있다. 

- 이연, 매일을 헤엄치는 법 -


이제는 앞만 보며 해치우는 전투 같은 삶이 아닌, 

주위를 온전하게 느끼며 탐험하는 삶을 살길 스스로에게 바란다. 


또다시 막 다르거나, 너무 가파르거나, 깊은 웅덩이를 마주하거나, 또 다른 벼랑을 마주하겠지만.

실패는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라고 생각하려고.

벼랑 끝에서 떨어졌지만, 또 다른 땅을 있듯이 말이야. 


그러니, 떨어질까 봐 무조건 겁내 하지 않으려고. 

나는 벼랑 끝에 몰렸던 인간이 아니라 벼랑 끝까지 가봤던 인간이니까.


이런 나의 용기가 너에게도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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