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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러클양 Nov 23. 2017

로마사를 통해 보는, 정치 제도가 초래하는 혼란

아우구스투스 이후. 내전이라는 제위 계승 방법의 탄생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흔히 아우구스투스로 불리는 제정 로마, 더 적확히 표현하자면 원수정(元帥政, Principatus, 프린켑스에 의해 통치되는 정치 형태)의 초대 황제에서 시작된 왕조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불린다.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라는 로마 최고의 파트리키(Patrici, 공화정 초기부터 명문 귀족) 가문이 이렇게 혼합이 된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과 그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 왕조는 아우구스투스에 이은 2대 황제로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할 때 데려온 아들인 티베리우스를 제외하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지만, 직계 혈통을 통해 세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반적으로 양자 결연을 통해 제위가 이어졌고 이는 향후 제위 계승에 있어 전통이 되는데, 이러한 양자 결연 제도 역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복잡한 황제 지위를 계승하기 위한 방법이다. 즉 황제가 제위를 물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우선 양자 결연을 한 다음 원로원에 황제가 보유한 권위와 특권들을 양자에게도 인정해 달라고 요청을 하고, 그것들이 승인되면 제위 계승자가 되며, 황제가 서거할 경우 제위를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릴뿐만 아니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성립 이후 제대로 지켜진 적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아우구스투스 재위 말기에 '다른 마땅한 제위 계승자가 모두 사망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위 계승자가 된 티베리우스는 이 후계자 수업 과정을 제대로 밟았지만, 재위 말년에 인간 혐오에 걸린 그가 카프리 섬에 은거했다가 서거한 이후 황제에 즉위한 칼리굴라, 칼리굴라의 암살로 황제에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황제에 즉위한 네로는 모두 이러한 절차를 정상적으로 밟지 않았다. 문제는 이 절차들이 단순한 행정상의 절차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제정 로마 황제위의 기능을 익히고 학습하는 과정이라는 데 있다. 티베리우스 이후 황제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위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약점을 갖게 된다.


(*주: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제위 계승자로 자신의 동생과 친구 아그리파 사이에서 태어난, 즉 율리우스 씨족의 혈통을 계승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입양하였으나 루키우스는 갈리아에서, 가이우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전사한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 "다른 마땅한 후계자가 모두 사망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상속인으로 지명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티베리우스 사후 황제에 즉위한 칼리굴라는 황제가 갖는 정책적 어려움을 인지하지 못한 채 황제에 올라 티베리우스가 적립한 재정을 낭비하다가 5년 만에 암살되었고, 칼리굴라의 삼촌으로 그 사후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건실하게 제국을 운영했으나, 그것에 그쳤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小) 아그리피나의 아들로 그녀가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면서 양자로 입적되고 그 이후 이름을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변경하게 된다. 이가 바로 우리가 아는 황제 네로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의 흉상.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네로의 흉상**

(**주: 당대 로마인은 깔끔하게 면도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다. 구레나룻을 기른 네로의 모습에서 그가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음을 알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오현제 이후 로마 황제들도 수염을 기르지만, 그것과는 별개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입적된 이후 당대 최고의 철학자인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를 교사로 학문과 군사 양면에 걸쳐 교육을 받는다. 이후 버섯을 좋아한 클라우디우스가 독버섯을 먹고 의문의 식중독***으로 서거하자, 바로 황제를 계승한다. 황제를 계승한 후 초기에는 세네카와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상당히 좋은 정치를 펼치지만,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와 갈등 끝에 그녀가 자신의 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총애하자 자신의 제위가 위협받는다 생각하여 그들 모두를 암살한 이후 조금씩 치세가 흔들리게 된다. 게다가 그가 통치하는 한 축을 담당했던 근위대장 부루스마저 죽게 되자 이는 걷잡을 수 없게 되는데, 문제는 네로의 일탈이 당시 로마 시민들이 보기에 어이없는 수준이었다는 데 있다.


(***주: 클라우디우스의 식중독으로 인한 사망은 현재 일반적으로 아그리피나가 아들인 네로의 황제 즉위를 위해 독버섯을 이용해 암살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스를 속주로 만든 이후, 더 적확히 말하자면 이탈리아 남부 마그나 그라키아(대 그리스) 지역을 병합한 이후부터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수용했다. 그러나 실질강건을 중시하는 로마에서 고급스럽되 유약한 그리스 문화는 단순히 교양의 습득에 그친다면 문제가 없었지만, 이에 심취하는 것은 로마답지 못하다고 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는데, 네로가 바로 이처럼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여 빠져든 경우다. 네로는 시인 선발대회에 나가 다른 시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대기하다가 리라를 타면서 시 낭송을 하는가 하면 올림픽에 출전해 황제라는 이유로 전 종목 우승을 하는 등 당대 로마인들이 생각하기에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네로의 행동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로마 대화제와 그 이후 재건 과정에서 네로가 공공건물에 무책임하게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의 저택)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서 폭발한다. 로마에서는 일반적으로 공공건물에 바실리카(Basilica) 혹은 포룸(Forum)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도무스는 개인의 저택에 붙이는 이름으로 로마 시민들이 대화제가 네로가 자신의 궁전을 짓기 위해 일으킨 것이라고 착각하도록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러한 내정에서의 실수에 더해 네로는 군사에 있어 중대한 실수도 범한다. 네로가 파르티아 전선을 책임진 사령관이자 로마 군대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던 장수인 코르불로를 로마로 소환해 ‘내란 주도 혐의’로 자살할 것을 명령하고, 고지식한 군인인 코르불로는 그 명령을 좇아 자살한다. 이 사건이 돌이킬 수 없는 네로의 결정적 실책인데, 로마 황제의 권위와 권력을 지탱하는 한 축인 군대를 적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네로에 반기를 들고 갈리아 총독 율리우스 빈덱스가 히스파니아 총독 갈바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대항하여 네로는 고지 게르마니아 군 사령관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 진압을 명하고 루푸스가 빈덱스를 격파함에 따라 휘하 병사들은 루푸스를 황제로 추대하나 루푸스는 거절한다. 이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정 로마에 있어 황제위는 혈통 혹은 그에 상당하는 정통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추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로마 군인 역시 시민이기에 그들에 의한 추대 역시 가능하며, 이것이 곧 내전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한 속주의 군인들이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면 다른 전선의 군인들 역시 그에 대항하여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제정의 최전성기 로마의 속주 지도****

(****주: Germania Superior(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가 고지 게르마니아, Germania Inferor(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가 저지 게르마니아다. Pannonia(판노니아)와 Moesia(모에시아) 구분 역시 마찬가지. 라인 강을 담당하는 게르마니아 속주와 도나우 강을 담당하는 판노니아와 모에시아 속주 담당 군단은 로마의 최정예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서 분홍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원로원 의원이 총독으로 가는 원로원 속주, 녹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황제가 총독과 군사령관을 임명하는 황제 속주다.)


루푸스의 황제 즉위 거절로 고지 게르마니아 군은 혼란에 빠지고 이 틈을 타 갈바는 황제를 참칭하며, 결국 로마 원로원 역시 갈바를 황제로 인정하게 된다. 이 혼란의 와중에 네로는 자살한다.


네로에 이어 황제가 된 갈바는 히스파니아에서 로마로 귀국하는데 3개월이나 시간을 낭비하고, 이에 더해 역대 황제들이 즉위 후 군인들에게 보너스를 준 것을 거부한다. 이는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게 된 것이 군대가 아닌 원로원에 의한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로 인해 갈바는 순식간에 모든 군단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갈바의 실책은 계속되는데 고지 게르마니아 군 사령관으로 자신에 대항했던 루푸스를 로마 본국으로 소환한 것이다. 이는 고지 게르마니아 군단병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곧 그들은 저지 게르마니아 군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추대한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자 갈바를 지원했으나 그가 황제에 즉위한 후 적합한 대우를 받지 못한 오토가 근위대를 끌어들여 갈바를 암살하고 황제에 즉위한다. 그렇지만 오토는 라인 군단-저지와 고지 게르마니아 주둔 로마군-과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이었고, 도나우 군단-판노니아와 모에시아 주둔 로마군-을 아군으로 만들지만 결국 패하고 자살한다.


라인 군단의 지지를 받은 비텔리우스가 오토에 이어 황제에 즉위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패배한 도나우 군단의 명예를 지켜주면서 원대 복귀를 시키기는커녕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처형하고 그 병사들을 크레모나의 원형 경기장을 짓는데 투입시킨다. 뿐만 아니라 도나우 군단과 격전을 벌인 전장을 지나면서 “적의 피는 그 냄새마저 향기롭구나.”라는, 적군은 물론이거니와 아군마저 경악케 하는 발언을 한다. 이처럼 많은 피를 흘리며 즉위를 했더라도 통치 과정이 올바르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비텔리우스는 황제에 즉위한 후 정치는 도외시하고 그의 취미인 폭식에만 몰두한다. 결국 증오에 불타는 도나우 군단은 당시 시리아 속주 총독인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봉기하지만, 무키아누스는 자신 대신 유대 반란 진압군 총 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한다. 이에 도나우 군단은 다시 한번 이탈리아로 진군하고, 이번에는 비텔리우스 군에 승리한다. 패배한 비텔리우스는 자살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있다가 로마에 진군한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한 후 테베레 강에 시체가 버려진다.


네로가 자살한 기원후 68년 6월 9일부터 비텔리우스가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 처형당하는 69년 12월 20일까지 만으로 1년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은 황제가 네 명이나 바뀌게 된다. 이 혼란의 원인은 다름 아닌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황제 시스템이다. 정치 만렙인 아우구스투스에게 있어 시민의 추대와 원로원의 인정을 받아 “아우구스투스”와 “프린켑스,” “호민관 특권”과 “임페라토르”를 인정받고 그 권위와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다소간 지난한 과정이었을지언정 그 행사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후계자들이 단 한 명, 티베리우스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유지되며,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지를 인지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칼리굴라에게 있어 황제는 그 풍요를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며, 클라우디우스에게 있어서 황제는 책에서 읽은 것을 견실하게 적용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네로에게 있어서 황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았다. 단순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로마의 주권자인 로마 시민과 원로원(Senatus Populusque Romanus, SPQR)의 추대와 승인을 받아야 하는 로마 황제의 특성상, 그것은 곡예사의 줄타기에 필적할만한 어려운 것이었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근엄하기만 해서는 시민들에게 인기를 끌 수 없고, 지나치게 인기 위주의 정책을 펼쳐서는 대내외적으로 업적을 원하는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로마 황제위가 가진 이 양면성을 아우구스투스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를 계승한 후대 황제들은 인식하면서도 실천하지 않거나(티베리우스), 인식하지 못하고 실천도 못했다(나머지 황제들). 그 결과는 네로의 자살과 그 뒤에 나타난 혼란이었다. 만약 네로가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을 공동 통치자로서 인정받게 했다면 아마 혼란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무력 다툼이야 어찌 되었든 황제의 정통성은 네로의 후계자에게 있기 때문이고, 그 경우 후계자의 역량에 권력 다툼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로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 과정에서 군대의 황제 계승에 대한 개입이 나타났으며, 이는 피로 피를 씻는 내전이 되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로마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제정 로마로 이행하면서 황제에 집중시켰지만, 위로부터 강제되는 혈통과 권위에 의한 황제위가 아니라, 밑에서부터 추대와 인정에 의한 황제위라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갖는 특성상, 그것은 태생적으로 황제의 정치적 능력에 심각하게 의존하며, 그 능력이 부족할 경우 황제위, 더 나아가 제국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임페리움은 황제가 보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전선에서 실제로 행사하는 것은 각 군단의 사령관이고, 그 사령관은 현장의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하기 때문에 로마 본국에 대한 불만이 있을 경우 이는 얼마든지 전선의 병사들이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여 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암살’과 ‘반란’이라는 견제를 통해 얼마든지 혼돈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는 지극히 위태로운 정치체제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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