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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러클양 Dec 11. 2017

로마사를 통해 보는, 정치 제도가 초래하는 혼란

오현제 2. 팍스 로마나의 확립

옵티무스 프린켑스(Optimus Princeps, 지고의 황제)의 치세는 끝났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의 성공이라는 영광의 절정에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퇴장했다. 트라야누스는 죽기 직전 유서를 남겨 유일한 친척으로 5촌 조카이자 시리아 속주 총독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를 제위 계승자로 지목했다. 하드리아누스의 치세와 그 결과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간략하게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관계와 하드리아누스의 젊은 시절 경력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드리아누스라는 인물의 성격과 그가 제위에 있는 동안 했던 일들의 기원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흉상. 그리스 문화 애호가답게 그리스식으로 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상술한 것처럼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당숙과 5촌 조카라는 관계로 얽혀 있지만, 그에 더해 후견인과 피후견인 관계로도 얽혀 있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열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면서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트라야누스와 나중에 트라야누스의 근위대장이 되는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지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트라야누스는 로마 군단에서 근무하는 서른셋의 일개 대대장(트리부누스, Trubunus)*에 불과했고, 아티아누스 역시 부유하긴 했지만 로마 군단에서 경력을 쌓는 기사계급의 일원이었다. 그 누구도 트라야누스가 황제에 즉위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젊고 유능한, 믿을 수 있는 친구 둘을 아들의 후견인으로 남겨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게 되었다.


(*주 : 트리부누스는 켄투리아 (Centuria, 백인대 ) - 코호르스 (Cohors, 대대 ) - 레기온 (Legion, 군단) 으로 이어지는 로마 군단에서 코호르스를 책임지는 고위급 장교다. 1개 켄투리아는 보통 100명의 중장보병으로 구성되며, 6개 켄투리아가 모여 하나의 코호르스를 이루고, 10개의 코호르스가 모여 1개 레기온을 이룬다. 즉 1개 로마 레기온은 6,000 명의 중장보병과 300 명의 기병, 그리고 군단병과 동수의 보조병(아욱실리아리우스,  Auxiliarius) 으로 구성되어 약 12,000 명 내외의 편제를 유지했다. 이 군단 구성에서 대대장은 실전 지휘관인 켄투리온(Centurion, 백인대장)과 고급 지휘관인 레가투스 (Legatus, 군단장) 를 연결하는 중간 지휘관이자 참모 역할을 한다.)


공화정 말기 ~ 제정 초기 복식으로 재현한 로마 군단의 켄투리온(Centurion, 백인대장).** 병사들을 지휘하는 일선 지휘관으로 공화정기에는 원로원 계급이 맡을 때도 많았다.


(**주 : 방패는 공화정기와 제정 초기까지는 타원형이었다가, 1세기 무렵에는 직사각형으로 바뀌게 된다. 보통 병사들의 투구에는 술이 세로 방향(앞뒤 방향)으로 되어있지만, 켄투리온은 가로 방향으로 되어있어서 구별을 가능하에 하였다. 입고 있는 갑옷은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 라고 불리는 사슬 갑옷이고, 가죽 끈으로 연결한 메달은 일종의 훈장이다.)


두 젊고 유능한 후견인은 하드리아누스를 히스파니아가 아닌 로마에서 교육하기로 결정한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그의 일생을 지배한 취미 둘 중 하나인 그리스 문화 애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실질강건을 중시하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 문화 애호는 일종의 ‘나약함’으로 여겨졌기에,*** 이를 걱정한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다시 고향인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또 다른 취미인 사냥에 눈을 뜨게 되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그리스 문화 애호와 사냥 모두 ‘관능’ 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하드리아누스는 일생동안 관능적이었던 남자라고 평가한다. 반면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서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그리스 문화와 사냥 모두 삶의 역동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었기에 몰두했다고 표현한 바 있다. 이러한 두 작가의 생각에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아마도 로마 황제들 중 가장 다재다능했던 하드리아누스의 두 측면 - 지적인 측면과 육제적인 측면 - 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저 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관능 혹은 삶의 역동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심취로만 평하기에 하드리아누스는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주 : 군사적 문화가 강한 로마와 비교했을 때, 그리스는 철학과 예술이 발달되어 있었고, 로마에서는 그다지 장려하지 않는 동성애 역시 자유로웠다. 이러한 까닭에 로마 지도층 인사들은 그리스어와 변론술을 배우는 것은 필수 교양으로 여겨졌지만 -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의 지식인들이 라틴어나 수사학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처럼 - 그리스의 철학과 예술에 빠져드는 것, 더 나아가 동성애에 탐닉하는 것은 일종의 나약함으로 간주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일생에 걸쳐 그리스 철학과 예술에 대한 애호를 숨기지 않았고, 동성애 역시 탐닉한 황제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친 후 하드리아누스는 군단에서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원로원에 의석을 갖고 있는 귀족의 자제인데다 유능한 후견인까지 두고 있었던 터라 일반 병사로 시작한 것은 아니고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Tribunus laticlavius,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로 판노니아 인페리오르(Pannonia Inferior, 먼 판노니아) 속주***** 주둔 군단에 부임한다. 백전노장의 켄투리온(Centurion, 백인대장)을 통솔하는 자리인 만큼 유능하지 않으면 쉽게 무시당하는 위태로운 자리이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이 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다. 이후 모에시아 인페리오르(Moesia Infrior, 먼 모에시아) 속주****** 주둔 군단의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로 전속이 된다. 이때부터 하드리아누스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확립된 로마의 영역.


(**** 주 : 아마 로마는 현재 미국처럼 인맥에 의해 출세 경로가 결정되는 사회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를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으로 번역한 것은 직역으로, 원로원 의원 혹은 그에 상응하는 자격을 지니고 있기에 군장 위에 주홍색 띠를 두른 망토를 두를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자리는 지극히 위험한 자리인데, 산전수전 겪은 노장인 켄투리온과 레가투스 사이 위치했기 때문이다. 즉 이 자리는 낙하산이긴 하지만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위와 아래 모두에게 비웃음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원로원 의원의 자제로 출세가 유력한 젊은이를 이렇게 험한 자리에서 교육한 것이야말로 "로마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주 : 판노니아 속주는 도나우 강 중류 지역으로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Pannonia Superior, 가까운 판노니아) 와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Pannonia Inferior, 먼 판노니아) 로 구분된다. 판노니아 수페리오르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동부, 헝가리 서부,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지방이며, 판노니아 인페리오르는 현재의 헝가리 동부, 크로아티아 동부, 세르비아 북부,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동부다.

****** 주 : 모에시아 속주는 도나우 강 하류 지역으로 모에시아 수페리오르 (Moesia Superior, 가까운 모에시아) 와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Moesia Inferior, 먼 모에시아)로 구분된다. 모에시아 수페리오르는 현재의 세르비아 대부분과 불가리아 서부에 위치하고 모에시아 인페리오르는 현재의 불가리아 대부분이다. 상술한 판노니아 속주와 모에시아 속주는 로마의 대 게르만 방어선의 핵심 지역으로 군단기지들이 밀집되어 있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고 네르바가 제외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인 97년 10월에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제위 계승자로 지명하고 다음해인 98년 1월에 세상을 떠난다. 황제에 즉위한 트라야누스는 근위대장으로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임명한다. 스무 살 청년 하드리아누스는 순식간에 로마 제국의 최고 지도자와 그 최측근을 후견인으로 갖게 된 것이다.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군단과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명예로운 경로)******* 양 쪽에서 유능한 경험을 쌓고, 물론 그 과정에서 사 년 동안의 휴식 기간은 있었지만,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서른일곱의 나이에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 군수 지원을 총괄하는 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 년 뒤, 하드리아누스가 마흔한 살이 되었을 때, 건강 악화로 쓰러진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본인을 대신한 파르티아 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로마로 귀환다가 소아시아 연안의 셀라누스에서 숨을 거둔다. 숨을 거두기 직전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입적함과 동시에 제위 계승자로 지목했다.


(******* 주 :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은 로마 공화정기에 원로운 계급의 남성이 출세하는 경로를 일컫는 말이다. 직역하면 '명예로운 사다리'가 되지만 일반적으로는 '명예로운 경로'라 번역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관직들이 무보수일뿐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자신의 재산을 시민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콰이스토르 (Quaestor, 회계감사관 또는 재무관) - 아이딜리스 (Aediles, 안찰관 또는 조영관) - 프라이토르 (Praetor, 법무관) - 콘술 (Consul, 집정관), 그리고 켄소르 (Censor, 재무관 또는 감찰관) 의 총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관직명에서 앞에 있는 번역명은 로마인 이야기, 뒤에 있는 번역명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먼역명이다. 이 관직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는 나중에 서술할 예정이다.)


여기서 의문이 시작된다. 과연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중국 송제국에서 태조 조광윤-태종 조광의로 이어지는 제위 계승의 의혹,******** 혹은 청제국에서 강희제 사후 유조에 후계자를 제사황자(第四皇子, 세종 옹정제 아이신기오로 윤진)라고 썼는지 아니면 십사황자(十四皇子)라고 썼는지에 대한 의혹*********만큼이나 많은 의혹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드리아누스가 황제를 암살했으며, 황후 플로티나와 근위대장 아티아누스의 협조에 의해 제외계승자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트라야누스가 다른 사람을 제위계승자로 지목했지만 플로티나와 아티아누스가 유서를 조작해서 하드리아누스를 제위계승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후대 사람인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제위계승자로 하드리아누스가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8월 9일 하드리아누스는 시리아 속주의 수도인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을 차기 황제로 임명한다는 트라야누스의 친서를 받았다. 같은 날, 트라야누스가 셀라누스에서 사망했다. 이틀 뒤인 8월 11일, 하드리아누스는 동방 군단의 장병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는 환호와 함께 충성을 맹세받는다. 셀라누스에서 안티오키아까지는 급하게 오면 이틀이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다. 그렇지만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 과정이 당대나 지금까지 하드리아누스의 제외 계승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황제가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기질 차이로 인해 하드리아누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제위 계승자로 지목하게 된 것을 꺼리게 된 원인이 아닐까... 어쨌든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은 말 그대로 ”인 엑스트리미스(in extremis, 최후의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 주 : 송태조 조광윤은 자신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조광의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문제는 이 유언을 남긴 자리에 유일하게 있었던 인물이 조광의였기에 후대 사람들에 의해 조광의가 형인 황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했다는 설부터 유언을 조작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는 설까지 다양한 음모론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된다. 물론 이 사건의 진실은 천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궁이다.

********* 주 : 강희제는 황태자의 비행으로 인해 황태자를 임명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유조를 통해 제사황자인 아이신기오로 윤진을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송태조-태종 계승 만큼이나 많은 의혹이 있고, 이 의혹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가 한국에서 리메이크된 바 있는 드라마 '보보경심'이다. 이러한 제위계승 의혹으로 인해 세종 옹정제 아이신기오로 윤진은 순치제때 적용되었다가 폐지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 차기 황제의 이름을 적어둔 종이를 남기는 방법)을 부활시킨다.)


그렇지만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그 치세를 평온하게 시작할 수 없었다. 선제 트라야누스의 측근 네 명이 그에 대한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키아 속주 초대 총독에 임명된 하비디우스 니글리누스, 아라비아 속주의 초대 총독에 임명된 코르넬리우스 팔마, 트라야누스 치세에서 집정관을 세 번이나 역임한 푸블리우스 켈수스,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 모두에서 실질적으로 트라야누스의 부장을 지낸 루시우스 퀴에투스. 선제의 중신이자 제위 계승의 경쟁자인 이 넷이 자신의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하드리아누스는 근위대장 아티아누스에게 “즉각적으로 대응할 것”을 지시하고, 아티아누스는 이들을 재판에 회부하지도 않고 국가반역죄로 모두 살해한다. 황제가 원로원 의원을 재판을 거치지 않고 죽인 것은 네르바 치세 이후 처음으로, 도미티아누스가 반대파 숙청의 무기로 사용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원로원과 수도 로마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파르티아 전쟁의 사후 처리를 하느라 하드리아누스가 11개월 뒤에 로마로 귀환했을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 의원 네 명을 전격적으로 살해한 것은 아티아누스의 독단으로 그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할 것이며, 앞으로 자신의 치세에 원로원 의원을 재판을 거치지 않고 국가반역죄로 처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이에 더해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시민들과 군단병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함은 물론, 화려한 경기대회를 개최하고, 황제가 즉위할 때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가 충성과 복종의 의미로 바치는 황금관을 지방자치단체는 폐지하고 속주는 그 액수를 반으로 줄여준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지방자치단체는 황금관을 바치지 않는 로마와 동등한 위치로, 액수가 반으로 줄어든 속주는 그 전보다 상향된 위치로 올려준 것이다. 제국의 수도 로마와 다른 지역이 그 이전보다 더 대등한 관계가 된 것이다. 이처럼 관계가 대등해진 지방자치단체나 속주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또한 하드리아누스는 장기 체납 세금을 모두 감면시켜주는 조치를 취함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한 편, 매 15년마다 한 번씩 토지조사를 시행하는 법령을 통과시킴으로서 공정한 세제를 집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경쟁자들의 숙청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인기 정책이었지만,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에서는 필요한 조치들이었고, 이를 통해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공중목욕탕에 거리낌 없이 갈 수 있을 정도로 로마의 분위기는 하드리아누스에게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 주 : 이 장면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쓰고 곽광수 교수가 옮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장면을 읽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한 번 읽을 가치가 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이 작품 덕분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된다.)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치세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과업을 시작한다. 바로 두 차례에 걸친 제국 전역의 순행이다. 그 이전까지 황제들은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는 했어도 모두 황제 즉위 이전 군 사령관, 속주 총독 등을 경험하는 과정에서였다.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다키아 원정과 파르티아 원정을 했지만, 이 역시 특수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하드리아누스는 달랐다. 그의 제국 전역 순행은 그 자체가 통치 활동, 그것도 굉장히 고된 통치 활동이었다. 황국에서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로마 대신 제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불편하게 지내면서 각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정책들을 제국 전체의 정책과 조화되도록 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에 동행한 풍자시인 플로루스가 지었다는 다음 시는 이 순행이 얼마나 고된 일었는지를 보여준다.


“ego nolo Caesar esse, / 황제는 되고 싶지 않아,
ambulare per Britannos, / 브리타니아 인들 사이를 싸돌아다니고,
latitare per...... (......는 불명) / (불명)을 헤매고,
Scythicas pati pruinas / 스키타이의 혹한에 살을 찔리니“


그렇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왜 이런 고된 순행을 한 것일까?


수성(守成)은 어럽다. 특히 전임자의 업적이 화려할수록 그렇다. 정복 혹은 공공사업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열광하게 만들고 무엇인가 새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그 열광에 빠져 정복이나 공공사업에만 치중한다면 제국은 재정이 고갈되어 멸망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치에만 신경 쓸 수도 없다. 화려하지 않고 일상적인 수수한 일만 하다보면 사람들은 불만을 갖게 되고,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면 곧 체제 불안정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 혹은 국가 최고 지도자의 역량(Virtus, 비르투)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이 미묘한 균형을 찾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 치중하기 마련이다.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정복 활동과 공공사업을 통해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확장할 수 있었다. 그 이상 판도를 확장하는 것은 무리다. 게르만 전선의 경우 판도 확장에 투입되는 비용보다 그 확장에서 얻는 이득이 더 적기 때문에 무리고, 파르티아 전선의 경우 트라야누스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득은 크지만 그 이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 얼마가 될지 불확실한 것 때문에 무리다. 결국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중단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 국경선을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 확정지었다. 심지어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조차 포기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물론 그 경우 게르만족이 다시 그 지역을 채울 것을 우려해 다키아 포기 계획을 ‘포기’하게 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마흔 다섯 살이 되던 121년, 하드리아누스는 126년까지 만 5년 동안 이어지는 그의 첫 번째 제국 순행을 시작한다. 순행 경로는 ”로마-라인 강 방위선-브리타니아-갈리아-히스파니아-시리아-로도스-트라키아-도나우 강 방위선-아테네-시칠리아-로마-북아프리카-로마”다. 이 첫 번째 순행에서 하드리아누스는 라인 강 방위선을 개편하고, 브리타니아 속주에서는 티안 강 하구에서 뉴캐슬을 거쳐 솔웨이 만까지 80 로마마일 (약 117 킬로미터) 에 이르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세운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는 새롭게 증가하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와 기존 로마 시민권 소유자 간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입안한다. 시리아에서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파르티아와 정상회담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로도스와 트라키아를 거쳐 도나우 강 방위선에서는 역시 라인 강처럼 방위선을 개편한다. 이후 아테네를 방문하여 몰락한 아테네를 재건하는 계획을 세우고 집행한다. 시칠리아를 거쳐 로마에 일시적으로 귀환하여 시민들을 위한 검투사 시합을 개최한 후 다시 북아프리카 속주로 출발한다. 북아프리카 속주에서도 역시 방위선을 개편하고 난 후에야 하드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다. 하드리아누스의 1차 순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중점을 기울인 것은 방위체제 개편이었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에서는 군단 기지와 군단 기지를 연결하는 가도 시스템을 정비하는가 하면 게르만 족의 침입을 더 빨리 정확하게 알릴 수 있도록 조기경보 시스템인 망루와 역참을 정비하고, 군단 기지의 시설도 개선한다. 브리타니아에서도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세워 침입을 쉽게 저지하게 만들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라인 강과 도나우 강과 마찬가지로 방위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개편한다. 마지막으로 파르티아와 협상을 통해 동방의 불안요소를 안정화 시켰다. 앞선 시대에 화려하게 팽창한 체제는, 그것이 기업이건 국가건 막론하고, 그 시스템을 꾸준히 보완하고 점검하지 않은 채 기존 시스템대로만 운영하면 변화하는 외부 환경에 맞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 도태되기 마련이다. 외부는 그 팽창한 체제에 맞서기 위해 끊임없이 학습하고 개선점을 찾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절한 시점에서 외부 변화에 대항하여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힘든 책무를 하드리아누스가 한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순행 경로 (출처 :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9권, "현제의 세기," 민음사.)


하드리아누스  방벽 전 영역 지도.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실제 사진


하드리아누스는 수도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1차 순행을 마치고 로마에 귀환한 하드리아누스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은 로마법 대전의 편찬이었다. 현재 우리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편찬한 로마법 대전만 기억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하드리아누스가 로마법 대전을 만들었다. 물론 하드리아누스 이전에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법 대전 편찬을 기획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술라는 독재관에서 은퇴하면서 로마법 대전 편찬 사업에서도 은퇴하는 바람에 중단되었고, 카이사르는 암살당하는 바람에 역시 로마법 대전 편찬 사업이 중단되었다. 카이사르 이후 100년이 훨씬 지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하드리아누스가 다시 이 작업을 시작하고 마무리 지은 것이다. 128년에 시작된 이 작업은 131년에 완료된다. 이를 통해 로마는 기존의 법을 집대성하고 상호 모순되는 법령들을 수정하는 등 법체계를 일관성 있게 만들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제국 내부의 시스템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내치의 안정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만들어 줌으로써 제국의 경제를 활성화함은 물론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피지배민족들조차 그 공정함을 신뢰함으로써 기꺼이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로 부를 수 있는 명실상부한 제국이 된 것이다. 상당히 많은 제국이 과도한 팽창 후 내부의 분열이나 내치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붕괴되었음을 상기해볼 때, 하드리아누스의 이 개혁은 로마 제국의 당장의 안정을 가져왔음은 물론이거니와 나중에 로마 제국이 4분할 통치를 거쳐 동-서 로마로 분열되었을 때에도 제국 내에서 통치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의 개혁은 긴 몰락의 과정에서도 제국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다.


128년 여름, 약 1년 반에 걸친 로마 체류를 마치고 하드리아누스는 134년까지 봄까지 만 6년에 이르는 두 번째 제국 순행을 떠난다. 이번 순행의 경로는 “로마-아테네와 그리스-흑해 연안-소아시아 내륙 지방-시리아-아라비아-유대-이집트-유대 반란 진압-로마”다. 앞서 1차 순행에서 제국 서방의 방위 시스템을 정비했다면 이번 2차 순행에서는 쇠락해가는 아테네와 그리스를 부흥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흑해 연안와 소아시아 내륙의 방위 시스템을 점검했으며, 시리아에서는 역시 파르티아 및 동방의 군주들과 함께 정상회담을 함으로써 이 지역에 있어 로마의 패권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후 트라야누스 때 새로이 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된 아라비아의 방위 시스템을 점검하고, 유대에서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야만적’이라는 평을 받던 할례를 금지시키는 법을 제정하고 예루살렘 인근에 자신의 씨족명을 딴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신도시를 건설해 유대 속주의 수도로 삼도록 만든 후 황제령 이집트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 할례 금지령과 아일리아 카피놀리나로 인해 하드리아누스의 이집트 체류 중인 131년, 유대 반란이 일어난다. 하드리아누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발탁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유대 반란을 진압한다. 거세게 일어났던 반란은 134년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종결되고, 반란 종결과 함께 모든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는 명령이 내려진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가 강제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1차 순행과 마찬가지로 2차 순행에서도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동방의 방위 시스템을 점검하고 제국에 지속적으로 불안요소로 작용한 유대 지역을 강제적으로 안정화 시킨다. 물론 이 시점에서 제국에 싹트는 불안 요소는 유대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된 기독교였지만, 당시에 기독교는 아직 수면 위로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전이었다. 파르티아와 전선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든지 양면 전쟁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유대는 제국의 동방 국경의 불안요소였고, 하드리아누스는 이 불안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할례 금지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건설이라는 도발을 한 것이다. 이 도발에 유대인들이 너무나 쉽게 넘어감에 따라 하드리아누스의 동방 방위 시스템 개편도 완료되었다. 장장 11년에 동안의 순행으로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방위 시스템 개편을 완료했다. 하드리아누스가 개편한 이 시스템은 로마가 게르만 족 및 사산조 페르시아와 양면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어느 정도 기능을 수행했다. 어떻게 보면 하드리아누스의 방위 시스템 개편이 로마 제국이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이백 년 가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6년 동안의 두 번째 순행을 마친 134년 봄, 재위 17년이 된 하드리아누스는 쉰여덟의 나이에 로마로 완전히 귀환한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북아프리카의 사막부터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브리튼 섬 북부까지 제국 전역에 걸친 순행으로 강철 같은 체력을 자랑하던 하드리아누스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망가진 상태로 돌아왔다. 이에 후계자 선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첫 번째 제위 계승자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선정했지만, 병약한 체질 탓인지 판노니아 속주에서 군단 생활을 경험하고 귀국해서 바로 죽어버렸다.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138년 1월 24일, 자신의 예순 두 번째 생일에 순행을 떠날 때 로마를 맡길 정도로 믿는 인물이었던 쉰 두 살의 티투스 아일리우스 풀비우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에게 후계자를 제의한다. 단,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로 17세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Marcus Aurelius Antoninus)를 받아들일 것을 조건으로, 한 달 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제위 계승까지 마무리 지은 하드리아누스는 날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티볼리의 별궁에서 바이아이에 있는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같은 해 7월 10일, 21년의 치세를 마치고 62세 5개월 16일의 삶을 마친다.


아우구스투스가 본인의 천재적인 정치력으로 만들어낸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하드리아누스 이상으로 잘 행사한 황제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을 수가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훌륭한 창업의 군주였지만 후계자 선정에 있어 문제가 있었고, 티베리우스 역시 훌륭한 황제였지만 그 특유의 인간 혐오로 인해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황제의 권력과 권위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는 말할 것도 없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세 황제는 나름 훌륭한 황제였지만, 제국 체제의 개편은 생각할 수도 없이 전 황제들이 저지른 문제들을 수습하거나(베스파시아누스), 갑자스럽게 터진 재해의 수습에 몰두하거나(티투스), 통치 과정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었다(도미티아누스). 재위 기간이 짧은 네르바는 황제와 원로원과의 관계를 복원했다는 데 의의가 있고, 트라야누스는 옵티무스 프린켑스 불릴 정도로 뛰어난 업적을 쌓지만 역시 창업군주에 어울릴만한 화려한 정복활동과 공공사업에 몰두했다. 결국 규모가 확장될 대로 확장된 제국의 전반적인 안전보장 시스템(국방) 및 사회 운용 시스템(법과 제도)을 정비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이 시작된 이해 하드리아누스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네르바와 트라야누스가 만든 기반 위에서 로마 제국의 안전보장 시스템과 사회 운용 시스템을 재편하여 제국이 더 오랫동안 유지됨은 물론 내부와 외부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시스템이 작동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물론 하드리아누스도 이러한 체제로 인해 후대에 문제점을 남긴다. 방어체제를 개편하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훌륭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황제인 본인이 재위기간의 3분의 2를 순행에 사용하여 수도 로마를 비움으로써,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로 하여금 황제가 로마를 소홀히 여긴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고, 이로 인해 그 다음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재위 기간의 전부를 수도 로마에서만 보내게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이 선택은 수도 로마에서 가만히 앉아서도 제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한 하드리아누스의 노력 덕분이지만, 이로 인해 황제는 제국 변경에 일어나는 문제를 소홀히 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오현제의 마지막이자 안토니누스 피우스 다음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도나우 강 유역에서 게르만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병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하드리아누스의 제국 체제 정비는 굉장히 역설적이게도 그 '현제의 세기'가 끝남과 동시에 무수히 많은 황제들이 전선에서 머무르고 또 그 전선에서 죽는 문제를 야기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로마 제국 내부의 정치 체제 문제뿐만 아니라 제국 외부 게르만족의 문제도 겹쳐지기 때문에 전적으로 정치 제도가 초래하는 혼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한 요소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선의 선택이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으며," "한때 안정을 가져다준 정치 제도가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일"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정치란 결국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을 지니는데, 이는 특히 정책의 유연한 수정이 어려운 제정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경로 의존성의 문제가 잘 드러나는 것이 오현제 시대 각 황제의 정치적 선택이다. 선대의 선택이 후대의 선택을 제약하며, 그 후대의 선택이 더 후대의 선택을 제약하여 결과적으로 혼란을 야기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치 제도가 초래하는 혼란”을 막기 위해 제국 전역을 순행하면서 그 체제를 재편하는 노력을 기울인 황제 하드리아누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오현제 사후 혼란은 훨씬 더 격렬하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고, 그 경우 제국의 몰락 역시 476년이 아니라 더 이르게 나타났을 수 있다. 이런 하드리아누스를 상징하는 말은 “팍스 로마나 에 아이테르니타스 임페리이(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rii,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이다. 21년 동안의 재위에서 11년의 순행은 아마도 하드리아누스의 체력과 지력이 뒷받침 되는 최대한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을 하드리아누스는 온전히 제국을 재편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하드리아누스가 서거 5년 뒤인 143년 4월 21일에 열린 로마 건국 기념제에 초대된 소아시아 태생의 철학자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가 남긴 헌사다. 건국 기념제에 초대되었지만 스물여섯에 불과한, 하드리아누스의 시대가 아닌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를 살아갈 이 젊은 철학자는 하드리아누스가 헌신해서 재편한 로마 제국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제는 나 같은 그리스인도, 아니 다른 어느 민족도,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신분증명서를 신청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원하는 곳으로 여행할 수 있다 로마시민권 소유자라는 것만으로 충분해졌다. 아니, 구태여 로마 시민일 필요도 없다 로마의 패권 아래서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자유와 안전이 보장된다.


일찍이 호메로스는 노래했다 지상은 만인의 것이라고. 로마는 시인의 이 꿈을 구현했다. 당신들 로마인은 산하에 들어온 모든 땅을 측량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천에는 다리를 놓고, 평지는 물론산지에도 가도를 건설하여, 제국의 어느 지방에 살든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정비했다. 게다가 제국 전역의 안전을 위한 방위체제를 확립하고, 인종과 민족이 달라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법률을 정비했다. 이런 모든 일을 통하여 당신들 로마인은 로마 시민이 아닌 자에게도 질서 있고 안정된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건강과 맞바꿔가며 11년에 걸쳐 이룩한 체제 개편으로 안정된 로마 사회에 대해 이보다 더 좋은 헌사는 아마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한 번 언급한 바 있지만,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이 추구한 이 가치를 이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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