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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an 30. 2023

할머니의 시간이 슬퍼서 울었다

음력 새해 첫날 아침, 할머니와의 짧은 통화를 마친 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베개가 축축해질 정도로 눈물을 쏟고 나니 가만히 달래주던 남자친구가 왜 울었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와 다름없이 즐거운 목소리로 조잘대며 통화를 마친 사람이, 난데없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눈물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떡국과 전은 없지만 배부른 새해 첫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아침의 눈물바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곤 답을 했다. "나 있잖아. 할머니의 마음이 슬퍼서 울었어. 내 마음이 아니라,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슬퍼서 내가 울어버린 거야."


고등학생 때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고, 대학부터 서울에서 혼자 살았으니 이제 혼자 산 세월이 가족과 산 세월과 비슷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설과 추석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불 밖으로 발 하나도 내밀기 싫은 추운 겨울이기도 했고, 얼마 전 우여곡절 끝에 힘든 이사를 마치기도 했고, 주말과 겹쳐 연휴가 짧기도 했고, 교통편을 구하지 못하기도 했다. 변명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입을 삐죽거리게 되는 이유들은 정말이지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합리적인 이유를 줄줄이 대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시리고 불편했던 이유는 바로 할머니였다. 지난 추석 이후부터 겨울, 연말, 연초까지 "설에 내려갈게요"라는 내 말 때문이기도 했고. 설날 아침부터, 아니 아마도 지난 추석에 내가 떠나고부터 나를 기다렸을 할머니를 잘 알기에 무겁게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드렸다.


이번에 시골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마자 휴대폰 액정에서 뜨끈하게 느껴지는 속상함, 서운함, 실망감, 슬픔, 외로움이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미리 준비한 이유를 줄줄 늘어놓았다. 몇 개월의 기다림이 허무하고 슬프면서도 우리 손녀가 서울에서 혼자 이사를 했다니 기특하고, 명절에 오지 않는 손녀가 서운하면서도 새해 첫날부터 잘 챙겨 먹지 못할까 걱정하는 우리 할머니는 이번에도 역시 "정말 사랑한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통화를 마친 직후,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 더 정확하게는, 나와 다른 할머니의 시간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 카톡, 유튜브, 넷플릭스, 맛집, 술자리... 온갖 자극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나의 시간과 다르게, 오로지 기다림만으로 가득한 할머니의 시간은 얼마나 더디게 흘렀을지. 밭일도, 인터넷도 없는 겨울의 시골에서 하염없이 시계와 달력을 보고 앉아 있었을 할머니의 하루는 얼마나 외롭게 흘렀을지. 그 모든 것이 슬퍼서 눈물이 터져버렸다.


무심한 손녀는 이번엔 "따뜻해지면 한번 갈게요"라는 말을 했다. "설에 내려갈게요"라는 내 말을 양손에 꼭 쥐고선 지난 가을부터 겨우내, 해가 바뀔 때까지 그저 농협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겼을 할머니를 꼭 뵈러 가야지. 내가 가는 날이 할머니에게는 벌써 봄이 왔나 싶은 따뜻하고 즐거운 날일테니 날이 좋은 어느 주말, 꼭 우리 할머니에게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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