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 거창하게 써보는 사소한 시작
우리 집 마당엔 연못이 있었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동그란 형태가 아니라 큰 구렁이 한 마리가 헤집어 빠져나간 듯 구불거리는 기이한 형태였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연못의 가지 위론 돌다리가 두 개나 놓여 있었고 불그죽죽한 철쭉과 향나무가 드리워져 있었다.
연못은 마당의 반의 반은 차지할 정도로 컸는데 참으로 쓸모없게도 물이 담기지 않았다. 집의 유래에 대해 아빠에게 언뜻 들은바론 일제시대 일본인이 살던 적산가옥을 사서 개조한 것이라 했는데, 그 시대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현대까지 버티는 수준의 방수력은 갖추지 못했나 보다.
어린 내 눈에 물이 없는 연못은 그저 을씨년스러웠다. 연못 깊이라 봐야 서너 살짜리 키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쩍 마른 바닥을 시커멓게 드러내고 있는 그곳에 발을 딛고 내려서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어느 날 마당 공사가 시작되었다. 흙이 트럭채 실려왔고 연못의 대부분이 메워졌다. 싹 메울 줄 알았건만 아빠는 한 귀퉁이를 남겨놓았다. 어쩌면 이 집을 살 때부터 연못을 살리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형을 보존하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고, 결국 여느 아담하고 동그란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아빠는 수영장이나 분수에 칠하는 파란 방수제를 바르는 것이 싫어 큰 비닐을 사다 깔았다. 구석구석 꼼꼼히 돌을 놓아 누르고 물을 채웠다. 찰랑이는 물속으로 크고 화려한 비단잉어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나는 잉어가 그렇게나 밥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지, 그렇게나 똥을 많이 싸는지 몰랐다. 가만히 두면 똥이 가라앉아 물이 흐려지므로 아빠는 단단한 대나무를 구해 그 끝에 철사로 둥그런 고리를 만들어 메곤 팽팽하게 망을 씌워 '잉어 똥 건지개'를 만들었다.
아빠는 하루에 몇 번이나 마당에 나가 정성스럽게 똥을 걷었다. 학교에서 엄마 아빠 모습을 그려 보라 하면 꼿꼿이 서서 우아하게 잉어 똥을 걷고 있는 아빠를 그리고 싶었을 만큼 (그러나 끝내 그리진 않았다.) 그 무용한 연못에 과할 정도로 마음을 쏟는 아빠의 모습은 내게 남다른 흔적을 남겼다.
그 무렵 아빠는 회사를 몇 년 쉬고 있었다. 어린 시절이라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빠의 모난 고집 때문이었을 게다. 아빠는 대학 졸업 후에도 2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청바지 한벌로 버티며 내내 바둑만 두었던 전적이 있는데 (할머니가 진저리를 치며 얘기하곤 했다.) 뭐 그 비슷한 상황 아니었을까 싶다.
어른들의 일이야 나는 모르겠고 그때의 아빠를 나는 무척이나 평온하게 기억한다. 해가 떠있을 동안엔 아빠는 거의 마당에 나가 있었는데 잉어 똥을 건지는 것을 시작으로, 진돗개 두 마리의 털을 가지런히 빗어주고, 개똥을 치우고, 낙엽을 모아 태웠다. 가을엔 감나무와 대추나무의 열매를 따기 위해 각기 맞는 장대를 만들었고 하루종일 나무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종종 내 미술 숙제를 훔쳐하기도 했는데 아빠가 너무 잘 만들어 버려서 학교에 낼 수 없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다. 아빠는 대개 사소하고 나른한 일에 부지런했다.
국민학교 6학년 봄. 학교 앞 육교에서 나눠주는 학원 전단지를 받아 들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 길로 집에 달려와 엄마에게 예술 중학교라는 데가 있다는데 나도 거기에 가고 싶다고 외쳤다. 내 성화에 엄마는 마지못해 수화기를 들고 전단지에 적혀 있는 번호를 눌렀고 예술 중학교가 무어냐 물었다. 그곳은 예중 입시를 지도하는 학원이었고, 한참의 통화 후 시험을 봐야 갈 수 있는 학교라는 답이 돌아왔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지금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 나는 제대로 된 미술학원 한번 다녀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저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에 가면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단 생각에 확신이 들었으니 말이다.
가만히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끝엔 기이한 연못이 뚫린 집을 좋다고 계약한 이 집 식구들, 특히 잉어 똥 하나도 우아하게 건져야 하고, 잘생겼다는 이유로 진돗개만 고집하고, 홍시 하나도 나란히 열을 세우던 아빠가 서 있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몇 년씩 바둑을 두고, 회사도 미룰 수 있는 아빠 말이다. 물론 우리 엄마도 등나무 공예를 배우고 동양식 꽃꽂이로 손님이 올 때마다 집을 빛냈지만 엄마의 솜씨란 너무 유용해서였을까, 나는 무용하게 시간을 늘이고 있는 아빠 쪽이 내 예술에 대한 동경과 더 맞닿아 있다 느꼈다.
아빠는 결국 회사로 돌아갔다. 돌아간 이후론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을 했다.
내가 예술학교에 가고싶다 선언했을 때 어른들은 나름의 가족회의를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게 종종 '그때 내가 너 미술 시키라고 했지' 생색을 내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하고 싶어 했지 할머니가 뭐..'흥칫 거렸는데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입장이 되고 보니 그토록 무용한 일을 기꺼이 하도록 등 떠밀어 주는 일이 쉽진 않았겠구나 이해가 된다.
눈이 밝은 우리 할머니가 아빠의 재주를 몰랐을 리 없다. 남과 부대끼며 원치 않는 사업을 끌어나가는 것이 성정에 맞았을 리 없다는 것도. 그래서 그렇게 몇 년씩 기다려줬을 거다. 속을 삭이고 다시 돌아갈 힘을 얻을 때까지. 아빠에겐 영영 무용한 일을 하는 따위의 선택지란 없었으니까. 그 시대의 장남이란 그런 자리니까.
그래서 할머니는 나만큼은 꼭 예술을 하게 해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아들에게 못해준 것을 아들의 딸에겐 해주겠노라 그렇게 큰소리 쳐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안다. 그랬을 거다.
무용한 미술과 중에서도 나른하기 그지없는 동양화를 전공으로 하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반겼다. 아빠는 남전 박노수의 '선소운'이 국전에 입선했다는 기사를, 거기 실린 그림을 한참을 두고 볼 정도로 좋아했다고 했다.
지금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별 쓸모는 없지만 아름다운 일에 마음을 쏟는 것을 좋아한다. 여전히 나의 가족은 나의 이 취미 같은 삶을 비호해주고 말이다. 피란 이토록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