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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Mar 29. 2021

경제는 모르지만 관념은 많습니다

경제관념 없는 여자의 변


 '띠리리리 띠리리리'


 알람 소리에 눈도 뜨지 않고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뒤적여 핸드폰을 찾아 쥔다. 잠들기 직전까지도 내내 들고 있었는데 깨자마자 또. 그래 이건 정말 나쁜 습관이다. 전자파에 뇌기능이 저하되거나 급 노안이 온다 해도 별수 없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나만 빼고 다 한다는 주식을 이제야 시작한 까닭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라 남이 다 들고 가며 흘린 찌끄레기라도 긁어모으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몇 번이나 튕기는 앱을 끈질기게 껐다 켜가며, 신분증 사진을 찍으랬다, 무슨 인증서를 만들고 또 만들랬다 하라는 대로 다 해서 힘들게 시작했건만 밤새 나의 주식은 안녕하지 못했다.

 두어달째 경제 공부라는 명목으로 생전 관심 없던 경제기사도 읽어보고 쌩초보를 위한 무료 경제 강좌도 수강하고 듣자마자 흘려보냈던 남들 재테크 얘기도 주워들으며 이리저리 쌈짓돈을 쑤셔보았는데 남의 화살표는 뻘겋게 잘만 오른다는데 내 거만 파랗게 메다꽂는 것이 역시나 갈길은 멀기도 하다.






 할머니 방 텔레비전 앞은 언제나 내 자리였다. 나는 비스듬히 누워 화면에 맛난 음식을 먹는 이들이 나올 때나, 멋진 풍광 속을 거니는 이들을 볼 때마다 먹고 싶다, 가고 싶다, 하고 싶다를 연발했다. 할머니는 내 부러움 섞인 감탄사를 들을 때마다 '하고 싶은 거 많아 좋으시겠우' 하며 추임새와 코웃음 사이를 오가는 맞장구를 붙였다.


 어려운 시대의 언덕을 힘들게 넘어온 할머니가 수장이었기에 우리  살림은 제법 넉넉했음에도 소비패턴은 사치와 거리가 멀었다. 기름보일러를 때던 오래된 주택은  추웠고 보일러 온도는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고정되어 한여름을 제외하곤 두꺼운 겨울잠바를 입고 양치질을 하는 것이 일상 풍경이었다.

 너른 방을  내버려 두고 굳이 굳이  식구가 연탄을 떼는 부엌방에 모여 앉아 구멍  옷가지를 기우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기워 입고도 낡아 떨어진 런닝이나 팬티는 기어이 걸레로 만들어 방구석이라도 한번 훔쳐야 버려질  있었다.

 전자레인지와 밥솥, 텔레비전  전자제품은 평균 수명이 서른을 훌쩍 넘겼고, 아빠의 자동차도  이상 수리할 부품을 구하기 어렵다는 소리를 들어야, 그러고도  년이나 심사숙고를 하다 길에   주저앉아야 마지못해 바뀌었다.

 어느 날의 정전으로 산소 공급이 오래 끊어진 탓에 연못의 비단잉어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허옇게 배를 뒤집고 떠오른 걔네들 마저 아깝다며 커다란 들통에 들들 끓여 마당의 개들이 포식했던 비린내 가득한 기억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새 책을 사주자마자 읽어 재끼곤 바로 또 새 걸 사달라 하니 급기야 엄마는 책을 숨겨버렸다. 몇 번을 반복해 읽어 지루해 죽을 지경이 되어야 새 책을 한 권씩 꺼내 주었는데 얼마나 감질나던지. 수줍어 동네 구멍가게에 들어가 껌 한 통 못 사던 애가 헌책방을 기웃거리게 된 것은 순전히 독이 올라서였다. 하굣길에 제법 큰 헌책방이 있었는데 쑥스러워 안쪽까지 들어가 뒤지진 못하고 그저 눈으로 스윽 훑으며 지나다녔는데 어쩌다 한 번씩 내가 읽을만한 전집이 묶여 나와있는 날은 혹여 누가 채갈세라 냅다 집으로 뛰었다. 새책 몇 권 살 돈으로 구르마가 터질 듯 헌책을 담아 끌고 갈 때면 어찌나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던지!


 그러나 그 기쁨을 친구들에게 내놓고 자랑할 순 없었다. 그 시절엔 지퍼를 열면 일제 펜이 터지듯 쏟아지던 짝꿍의 필통이, 색색으로 꼬불거리던 미제 리본을 단 포니테일이 부유하게 느껴지던 때였으니까. 성실하게 깎인 연필만 반듯이 누워있는 필통을 지니고 엄마가 보자기를 두르고 자른 단발머리를 하곤 매일 헌책방 문 앞을 기웃거리는 일상이 궁상맞게 느껴질 때도 많았으니까.  


먼 훗날에야 깨달았다.
실은 구멍 난 팬티로 닦인 방에서 쥐 오줌이 묻은 책을 한 번의 방해도 없이 읽으며 예술, 문학, 철학, 역사의 언저리를 잔뜩 뛰어놀았던 유년이야말로 진정한 사치였다는 걸.







"집이 살만한가 봐요?"


 이건 뭐 미대생과의 만남에서 반드시 해야 할 질문 목록이라도 있는 건지 전공을 밝히면 여지없이 돌아오는 편견의 날. 적응이 될 만도 하건만 맞아도 맞아도 발끈하게 되는 걸 보면 나도 참 멀었더랬다. 하지만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서 좋겠다는 찬사가 아니라 헐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도 되는 삶에 대한 비아냥이라는 것이 자명한데 속없이 실실거릴 순 없었다. 돈 벌 걱정 없는 속 편한 애들이 택하는 전공 - 예술하는 이들에 대한 편견은 생각보다 저변이 넓었다.

 상대의 허우대가 멀쩡할수록 안타까움은 컸다. (하아) 통상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와는 사랑이든 우정이든 꽃피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비와 재료비를 걱정해야 할 형편은 아니지만 우리 집도 꽤나 궁상맞다는 변을 늘어놓아야 하나, 없는 거드름을 길어 올려 보란 듯이 피워줘야 하나 복잡해진 머릿속을 부여잡다 어색한 분위기로 시간만 흐지부지 흘러갔다. 경제적 이득을 얻기에 유리한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부여잡고 있는 가치들이 호도될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의 남편과 만나봐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질문 때문이었다. 첫 만남, 딱 보기에도 헐어빠진 차를 끌고 나타나 다 떨어진 조리를 찍찍 끌며 유독 물비린내가 끼쳐오던 고수부지로 데려가더니 맥주 한 캔에 꾸이맨을 사주며 그가 물었다.


"인생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는 내가 이상을 좇느라 발을 땅에 대지 않고 사는 사람같아 좋다고 했다.  

 만난 중 가장 허황된 소리를 떠들던 남자는 수학과 컴퓨터 - 내 평생 가장 멀게만 느껴지던 것들 - 을 전공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 뇌엔 없는 어떤 것이 그의 뇌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 불확실한 짐작만으로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다니던 회사를 관뒀다. 창업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그러라 했다. 남을 위해 소모되는 일 - 그것이 경제적 안정을 얻는데 더 유리할지라도 - 보다는 나를 위한 일 - 그래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 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었다.

 그건 예술가의 마음이니까.


 훗날 어찌 그런 무모한 결정을 겁 없이 했냐 묻는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사업을 하더니 남편마저 가끔 나를 '경제관념이 없다'는 말로 타박을 했다. 타박이 아니라 그저 팩트를 말하는 것뿐이라는데 원체 싫은 소리 못 듣는 못된 성격이라 때마다 악악거리며 맞서게 되었다.

 분하지만 영 틀렸다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나의 셈법이 자본주의 시장원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혼하여 살림을 살며 순간순간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 싶고,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얻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돈이란 것은 땅 파서 얻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니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남편이 허공에 떠있는 관념들을 지껄일 줄 알면서도 숫자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에 기대했던걸 보면 나도 어렴풋이 숫자들 -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경제지표들 - 의 중요성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이제 그 숫자 창출의 주체가 어영부영 부모가 된 나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 인터넷만 켜도, 사람들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라도 돈 얘기가 쏟아지는데 그때마다 난 그저 희뿌옇게 흐려지는 정신을 붙들며 지루함만 견디고 있는 부류였으니.

 있는 것을 아끼고 아끼는 것, 내가 하고픈 것을 조금 미루고 가족과 나누는 것정도면 나도 꽤나 경제관념을 챙기며 살고 있다 여겼는데 남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지경이라니.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거기까진 못가지 싶다.


 아니 그렇대도,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해도 경제관념 하나 탑재하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처럼 무례한 비아냥을 던져도 그냥 맞아야 할 정도로?


 관념이라면 내 안의 책장에 이미 빼곡히 들어차 있다.

 

 빛바랜 종이 내음에 잠기던 시간이, 아름다운 것을 좇던 습관이, 온갖 재미있고 새로운 이야기에 기울던 마음이 나에게 수많은 관념을 선물했다.

 나의 어리고 젊은 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서재를 분야별로 채우느라 분주하고, 사이사이 섞여 들어온 상념을 솎아내느라 치열했으며, 어쩌다 책장에 베이기라도 하는 날엔 끙끙 앓으며 지났다.

 손에 쥐고 거래할 수 있는 재화를 창출하지 않는다고 해서 평가절하되기엔 나의 서가는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아쉬움이라면 유독 형이상학적인 것에 끌리는 취향이라 투명한 책장을 덮은 듯 내보이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고 시간이 한정적이라 (물론 흥미도) 몇몇 서가를 미처 채우지 못했을 뿐. (예를 들면 경제라든가, 경제라든가, 경제라든가....)






 이만큼 크고 보니 내가 마음 놓고 예술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건 비싼 학비를 척척 낼 수 있는 경제적 부유함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환경 덕분이었다.


 천 원 한 장도 반듯하게 머리를 맞춰 애지중지 하고, 10원 하나 틀리지 않게 가계부를 적고, 내복 무릎은 기워입힐 지언정 생각하고 느낄 시간만큼은 조각나지 않도록 방문을 닫아 주었던, 내가 좋아하고 바라는 삶이 허황되다 느껴지지 않게 해 주었던 가족.

별 볼 일 없는 예술가 허세에, 시답잖은 철학 놀음에, 싸구려 감상 파티에 추임새를 넣어 주었던 친구들.

이상할수록 멋지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자유로우라고 종용하고, 있지도 않은 천재성을 만들어 발견하던 선생님들이 나의 진정한 부요함이었다.


 더 비싼 밥을 먹고 더 높은 집에 살고 더 큰 차를 타는 것을 성공이라고 부르는 사회에서 쥘 수도 볼 수도 없는 낭만이 밥 먹여 준다 소리칠 순 없지만 그 쓸데없는 낭만이 초라한 밥상을 근사하게 만들 순 있다고 꿍얼거려본다.


 그래서 돈 안되고 성가시긴 오죽이도 성가신 온갖 눈에 뵈지 않는 것들을 내 관념의 서가에 꼼꼼히 채워가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인생이라고, 그게 내 경제관념이라고 말이다.

 

 낭만으로 채워진 서가를 다른이들과 나누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그것이 터무니없이 경제적 손해를 보는 일이라해도 하고 싶다. 조건없는 관념의 부유함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마이너스 셈법으로 살고 싶다.


오늘은 파랗게 내리긋는 주식 그래프도 때맞춰 내리는 봄비로 보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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