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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Apr 15. 2021

애도의 시간

철사 코끼리, 고정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겨울의 한 복판. 2년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다는 것도, 그 대단한 사랑이 자잘한 실망과 서운함 따위가 쌓여 끝이 날 수 있다는 것도 그 연애에서 배웠다.


 이별통보는 내가 했다. 말을 꺼낼 시기를 여유 있게 고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은 진작에 접힌 상태였다. 눈물도 분노도 없는 더없이 깔끔한 이별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느닷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기 전까진.

 

 지나치게 순조로운 몇 주를 보낸 뒤였다. 난데없는 그리움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끝도 없이 솟구쳐 이불로 재갈을 물어도 오열의 바다를 이루었다. 위험수위까지 물이 찰랑이던 둑에 금이 간 것처럼 한번 터진 감정은 삽시간에 제방을 무너트렸다. 내가 우는 게 아니라 울음이 나를 뱉었다.


 괜찮았다. 머리로는 납득하고 정리했으며 그와의 시답잖은 에피소드 몇 개쯤 웃으며 꺼내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 유독 걸음이 느린 내  마음은 이제야 헤어짐에 도달한 건지 서너 밤을 내리 울고도 그칠 줄을 몰랐다. 당황스러웠다. 이 감정을 도대체 정의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벌건 눈을 겨우 뜨고 앉은 나를 보며 인생 꽤나 산 것 같은 선배가 말했다.


"지극히 정상이야. 너는 지금 너의 헤어짐을 애도하고 있는 거야. "







<철사 코끼리> 첫장을 넘기자마자 만나게 된 작가의 인사.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우는 마음을 한 단어로 옮긴다면 '애도'가 아닐까.



 그림책 <철사 코끼리>의 소년 데헷은 고철을 주워 산다. 그의 곁엔 언제나 아기 코끼리 얌얌이 있다. 황망하게도 얌얌은 세 번째 페이지에서 죽는다.

 데헷은 얌얌이 보고 싶다. 몇 날이 흘러도 그 마음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철사를 모아 얌얌을 닮은 코끼리를 만들었다. 얌얌과 그랬듯 어디든지 끌고 다녔다. 고철이나 줍던 어린애 신세였으니 엉성한 데다 잔뜩 녹이 슨 철사를 겨우겨우 구부리고 친친 감느라 손이며 몸이 수 없이 긁혔다. 무겁고 성긴 철사 코끼리를 질질 끌면 요란하게 덜그럭 거렸다.

 어떤 이는 아이의 상처를 걱정했고 어떤 이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거대한  철사 코끼리의 그림자와 소음에 가려 데헷에겐 사람들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시작부터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코끼리를 죽이더니만, 음침한 철사로 만든 코끼리를 몇 날 며칠이고 끌고 다니는 괴상한 이야기라니.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다시 표지로 돌아와 작가 이름을 되뇌었다. 고정순.

그리고 이야기를 다시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이 어두운 이야기에, 쓸쓸한 그림에 자꾸만 손이 갔다. 앉은자리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 읽는 동안 내 안 어딘가가 덜그럭거렸다.


 유일한 친구 코끼리의 죽음은 간추려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비어버린 자리에 스미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아이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애도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한참을 아프고 다치고 외롭고 난 어느 날 데헷은 철사 코끼리를 바라보고 깨닫는다.


'얌얌하고 하나도 닮지 않았어.'


몇 날이 흘러도 그대로이던 데헷의 마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결말에선 철사 코끼리도 너무나 멋진 모습으로 변신하는데 책에서 느낄 감동을 앗아가지 않기 위해 이곳엔 담지 않겠다.


데헷과 철사 코끼리의 이야기를 반복해 읽는 동안 내 속에 들어 있던 철사뭉치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쑥 뽑혀나갔다. 잔뜩 긁힌 상처에 뜨뜻하고 끈적한 진물이 베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아, 나 위로받았구나.'






 나는 얼마 전 할머니를 잃었다. 몇 달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할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쏟아진다. 며칠 전엔 밥 먹으러 간 식당에서 두리번거리다 눈이 마주친 옆자리 할머니의 눈두덩이 우리 할머니랑 너무 닮아서 왈칵 울어버렸다. 전혀 슬프지 않은 상황에서 난데없는 사람을 바라보고 우는 여자라니 황당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혼자 있을 때 생각을 타 넘다 할머니에게 미치면 어디 비수라도 콱 꽂힌냥 연극적 가식을 더해 자지러지게 울어재낀다. 관객 하나 없는 요란한 1인극을 끝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슬픔이 한 움큼씩 덜어진다.   


 할머니는 죽으면 화장을 해달랬는데 남은 가족들은 굳이 매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름 할머니의 유언인데 왜 안 듣는 걸까 조금 의아했는데 장례를 지내보니 그러길 잘했다 싶다.


 화장을 하면 작은 유골함에 담겨 사뿐사뿐 갔을 길을 우리 할머니는 크고 무거운 관에 누워 무겁게 걸었다. 열명도 넘는 자식, 손자, 사위, 이웃의 팔이 번갈아 할머니를 안아 올렸다.

 아빠가 힘주어 고른 오동나무관은 어찌나 무거운지 여럿이 구령을 맞춰 힘껏 들어 올렸다가도 겨우 몇 발자국을 내딛고는 쉬어야 했다. 관은 바닥에 닿으면 안 된다, 뒷걸음도 안된다 금기가 쏟아지는 상조회사 아저씨의 잔소리를 리듬 삼아 온 힘을 다해 걷다 쉬기를 반복하며 길고 좁은 산길을 행진했다. 관 든 사람들은 얼굴이 벌게져서 숨도 겨우 쉴 정도인데 지켜보기나 하는 나는 우리 할머니 꽃가마 탄 듯 호강하네 슬그머니 신이 났다.


 중노동으로 옮긴 관은 이제 먼저 모신 할아버지 곁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그게 또 큰 공사였다. 묘에 두른 석축을 모두 들어내고, 포클레인으로 땅을 팠다. (포클레인이 들어오기 위해 길도 냈다.)

 그런데 관 사이즈가 준비된 자리에 맞지 않아 석곽을 깨느니 마느니 어른들은 합동 회의가 벌어졌고, 그 사이를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며, 그 곁에 밥차가 늘어지게 진수성찬을 차렸다.


 울다 웃다 삽질을 했다 꽃잎을 뜯다 어묵꼬치와 제육볶음 사이를 오가는 슬픔과 어수선함, 산사람과 죽은 이가 소란스럽게 섞여 들어가는 무덤가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웠다. 온갖 생소하고 괴상한 장례의 과정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니 꽉 막혔던 마음이 슬금슬금 풀려나왔다.


 나는 제법 쿨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여기고 살았는데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착각이었다. 마음에 깊이 박힌 사람 하나 뽑을 때마다 이렇게나 고단한 허례허식이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이왕 하는 거 커다란 꽃상여를 만들어서 어깨에 이고 어기적 어기적 걸었어도 좋았겠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고래고래 창을 했어도 좋았겠다. 하얀 소복을 차려입고 엉엉 곡을 하며 동네 한 바퀴 돌걸 그랬나. 포클레인 말고 삽 하나씩 들고 하루 종일 흙투성이가 되도록 삽질을 했어도 좋았겠다....


 끝도 없이 황당하고 화려한 장례식을 상상할수록 할머니는 사뿐사뿐 곱디고운 꽃길을 멀리멀리 걸어갔다.  






정신분석 용어사전은 애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애도 (mourning)

의미 있는 애정 대상을 상실한 후에 따라오는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정신 과정. 애도는 주로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사별)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모든 의미 있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일컫는다.
애도의 지배적인 기분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이러한 기분은 외부 세계에 대한 흥미의 상실, 상실한 대상에 관한 기억에의 몰두, 새로운 대상에게 투자할 수 있는 정서적인 능력의 감소 등을 수반한다.
정상적인 애도는 병리적인 것이 아니며 치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인은 상실에 적응하고 관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한다.


 헤어진 이를 떠올리는 순간은 너무 고통스럽다. 찌르는 듯도 쑤시는 듯도 때려 박는 듯도 하다. 이렇게 몇을 내리 잃으면 나는 정말 못살겠다 싶을 정도다.

 아프니까 정말 아프니까 나는 별수 없이 울어재낄 거다. 흉하고 불편해도 원 없이 그럴 거다.

'그래도 된다. 그래야 된다.' 철사 코끼리와 데헷이 함께 걸어줬다.



 고정순 작가는 산문집 <그림책이라는 산>에  <철사 코끼리> 이야기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불현듯 닥치는 이별 앞에서 아파하는 사람에게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는 언어가 그림책뿐이다. 충분히 슬퍼하고 자기 앞의 생을 적절하게 긍정하길. “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든 분들께 이 위로가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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