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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Jun 08. 2021

정리의 여왕

인형을 버리고 텐트를 샀습니다

30평대 아파트의 수납 상황이란 뻔하다.

십 년 넘게 한 집에 살며 쌓고 쟁일 수 있는 곳이란 곳엔 죄다 짐이 들어차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건 옷장과 이불장을 또 한 번 뒤집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 그간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지혜는 다 끌어모았는데 이젠 그보다 더 한 것 - 곤도 마리에 여사의 단호함? -  을 끌어다 써야 할 모양이다.


현관 앞에 자전거 다섯 대가 (남편 것이 두대!!) 늘어서는 것 까지는 괜찮았다. 헬멧 네 개 정도의 자리를 더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남편이 자전거를 직접 고쳐 타겠다며 자전거 수리 장비를 사기 시작했을 때도 신발장 한 칸을 비우는 정도로 해결이 가능했다.

언젠간 다시 신을  있으리라 바라보고만 있던 하이힐을  버렸지만 어차피 신지 못할 몸이 되어버렸으니 괜찮았다.


남편이 자전거로 누비는 거리가 점점 길어지면서 자전거에 싣고 다닐 캠핑 장비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도 '초경량'이라는 단어의 콤팩트함을 믿었다. 마루 한 켠에 스러지지 않는 용품의 산이 솟아오를 줄은, 그놈의 신소재가 온 집에 널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았다. 거실에서 대부분의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시간을 보내는 십대가 되었고, 심지어 내가 어질러지는 것에 둔감하도록 키웠으므로 나만 눈을 질끈 감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다 보니 좋은 곳이 너무 많다며 온 가족이 함께 캠핑을 해보자 했을 때는 아주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더 이상의 짐과 정리를 견딜 수 없다!!"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살림에 드는 노고란 이미 바닥이 났고, 난장판이 된 집과 관리 안된 장비들을 제칠 수 있을 만큼 뻔뻔한 미감을 갖지 못한 탓에 도저히 이것 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남편은 당근마켓에서 텐트 거래에 성공했고 (!!) 워낙 저렴하게 산거라 한 두 번만 캠핑을 하고 버려도 본전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으며 - 물론 가족 수대로 에어매트에 침낭까지 준비되어 있었지만 - 그게 텐트보다 훨씬 훨씬 비쌌지만 - 그렇게 무작정 텐트만 싣고 간 노지 캠핑에서 아이들도 나도 꽤나 큰 자유로움과 상쾌함을 맛보았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나는 아무래도 의자와 테이블은 있어야겠다는 의견을 덧붙였고 - 그래서 또 '초경량' 의자 네 개를 구입했고 - 낭만에 죽고 사는 가족인지라 야외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말에 포터블 빔 (심지어 집에 이미 빔이 있는데도 '초경량'이 아니라는 이유로)을 추가로 구입하는 것에 모두 찬성했고, 그러고 나니 또 스크린을 겸할 그늘막이 필요했고, 그걸 세우려니 온갖 고리에, 무쇠 팩에, 끈과 봉과 온갖 조명과 등등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입이 이어질 수밖에.


어쨌든, 장비가 갖춰졌으니 부지런히 써야지.

그새 우리는 세 번의 캠핑을 다녀왔고, 아이들이 커 갈수록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데 캠핑을 하며 (어쩔 수 없이) 함께 짐을 나르고, 장비를 세팅하고, 좁은 텐트 안에서 살을 부대끼는 경험이 참 값지겠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캠핑의 맛을 알아가고 있다.


캠핑의 낭만은 짐 정리의 수고와 맞바꾸는 것




새롭게 늘어난 캠핑 짐들을 수납하기 위해선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 이미 몇 차례나 비우고 채우기를 거듭했던 터라 더 이상 버릴 것도 없다 생각했는데 창고 한구석을 채우고 있던 큰 인형상자가 눈에 띄었다.

학교 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던 딸에게 저 인형들을 버려도 될까 물으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한 승낙이 떨어진다.


'하아...'


이것에 비하면 내 하이힐이나 결혼 전 입던 옷을 버리는 것은 얼마나 쉬운 결정이었나. 큼지막한 쓰레기 봉지와 인형 무더기를 번갈아보고 있노라니 금세 눈이 시큰 거린다.


'고마웠어 얘들아.'


옷장과 이불장을 뒤집고, 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몸이 너무 고되다. 그러나 진짜 힘든 것은 물건들과 함께 내 시절의 한 조각을 떼어내는 기분, 원치 않게 헤어짐을 경험해야 하는 일이다.


인형이 나간 자리에 들어앉은 캠핑장비들도 언젠간 떠나보낼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가족의 추억을 또 많이 많이 새겨야지. 물건처럼 사라지지도, 버려지지도 않을 감정과 기억들을 내 안에 차곡차곡 쟁여야지.


오늘의 정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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