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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Dec 03. 2020

상냥한 죽음

<할머니의 팡도르> , 오후의 소묘

몇 번을 고약하게 아팠던 탓인지, 예술가 입네 떠들고 팠던 허황된 낭만주의 때문인지 나는 꽤 어린 나이부터 죽음을 가깝게 떠올리곤 했다.


무르고 나약한 정신이 버티기 버거운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느리게 걷는 것보다 맹렬히 달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다그치는 세상에 발을 디딜 때마다 유리로 된 신을 신기라도 한 양 척추가 저리고 손이 곱았기 때문이다. 당차게 맞서지도, 에라 넘어서지도 못하는 고약하게 성실하고 소심한 아이에게 삶은 씹을수록 쓴 물이 났다.


삶은 고. 어쩌면 이 모든 어려움을 끝내는 죽음은 즐거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마음은 어리석은 동경으로 가득 찼다.





우습게도 정말 죽음이 성큼 다가왔다고 느낄 만큼 호되게 앓고 난 후, 죽음을 기다리는 일을 멈췄다.


젊은이에게 들이닥치는 죽음의 숨은 마냥 거칠었고 걸음은 사방을 헤집어 놓았다. 잘 벼린 칼로 내리 그은 듯 단정한 끝이란 나의 낭만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의 신사적인 공수교대 따위를 기대하기엔 이십 대의 시간이란 지나치게 창창했다.


상황이 파악되자 그 오랜 기다림이 무색할 만큼 나는 죽음 곁에서 재빠르게 몸을 털었다. 때 맞춰 해사한 미소로 내밀던 삶의 손은 아마도 인내심 많은 신의 한 수 아니었을까.

지금은 면목없는 김에 염치도 없이 열심히 보약과 영양제를 털어 넣는다. 잡은 손은 더욱 꽉 그러잡는다. 그렇게 생은 가까이, 죽음은 멀리 미뤄두었다.

手手手手





할머니의 팡도르 / 안나마리아 고치 글,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 정원정, 박서영 옮김 / 오후의 소묘 / 2019



먹음직스러운 팡도르를 벌건 동그라미로 데굴데굴 그려놓은 모양새며, 그걸 또 먹겠다고 입인지 얼굴인지 들이대고 앉았는 낯선 존재라니.

<할머니의 팡도르>의 괴상하게 따스한 (할머니의 하늘색 타이즈와 지나치게 아담한 스툴은 또 너무 사랑스럽다) 표지를 보곤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덥석 책을 집어 들었다.


죽음조차 자신을 잊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오랜 세월을 고단하게 살아온 할머니. 할머니의 외딴집이 크리스마스 빵 굽는 냄새로 가득하던 밤 드디어 죽음이 문을 두드렸다.
발길을 재촉하는 사신의 입에 방금 완성된 달콤한 소를 밀어 넣으며 할머니는 맛있는 빵이 완성될 때까지 일주일을 기다려 달라한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신도 생전 처음 맛본 단맛 앞에 정신이 아득해져선 문을 닫고 돌아설 수밖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분개했지만 눈처럼 고운 설탕가루를 흩뿌리고 있는 할머니를 두고 사신은 또다시 물러선다.



태연히 바쁜 할머니와 우왕좌왕 귀여운 사신



이야기를 건조하게 축약하자면 '고독한 할머니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빨강, 검정, 하늘 세 가지 색으로 버무린 창백하고 단조로운 그림은 죽음이 다가온 그 겨울의 온도를 닮았다. 하지만 결코 차갑지 않다. 책장을 넘길수록 달아오른 오븐 앞에 앉아있는 양 더운 기운이 끼치고 불길이 너울거린다.


내색은 안 했지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주름을 가진 할머니에게 죽음은 드디어 만난 반가운 손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생을 응집한 솜씨를 다해 설탕과 향신료에 졸인 귤 향기로, 부드러운 버터향으로, 고소한 아몬드와 헤이즐넛으로, 따뜻하고 촉촉한 빵의 감촉으로, 바삭하고 끈끈한 누가의 맛으로 제대로 채워 먹여주고플 정도로.

  

죽음도 그렇다. 생전 처음 맛본 설탕과 건포도의 맛은 분명 놀라웠겠지만 사신의 본분을 잊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 세는 것이 의미 없을 만큼의 시간을 살아낸 이에게 그저 못 이기는 척 작은 상냥함으로 예우를 다한 건 아닐까.


사신은 (그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고단했지만 잘 견뎌낸 생의 존엄함 앞에 급한 발길도 늦추는 죽음.
이런 상냥한 죽음이라면 한번 기다려보고 싶다.


감히 청할 수 있다면 단정하고 단호히 내리긋는 죽음보다 소란히 헤매는 마음 여린 죽음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그 느슨함에 기대 나 역시 조금은 더 상냥한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세상 모든 죽음이 더 없이 상냥하기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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