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현의 입장
다음날 아침, 승현에겐 연락이 없었다. 역시나 주사였구나 생각했다. 잠에서 깨 숙취에 시달리며 어젯밤 나에게 한 실수를 생각하면 얼마나 민망해할까 고소했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아침부터 스케줄이 있어서 바쁜 건 아닐까? 아직 자나? 36살이 돼도 연애에 관해선 하는 짓이 20살짜리와 다름없다.
오후 12시가 넘고 1시가 넘었다. 이제 승현은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연락이 온다 해도 난 씹으리라 마음까지 먹었다. 내 기준에선 마음이 있다면 12시 전엔 연락을 했어야 했다. 봐줄 수 있는 건 12시까지였다. (왜 이리 조급하게 굴었을까 이제와 생각하니 가소롭다) 잘됐다 싶었다. 내가 이 나이에 그냥 연애만 할 것도 아니고… 무슨 연예인을 만나고 그것도 미혼부를 만나 어쩔 것인가. 그런데 자꾸 마음이 쿡쿡 쑤셨다. 섭섭했다.
오후 2시 연락이 왔다.
- 우리 6월 1일부터 사귀는 거 알지요?
이건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술에 취하긴 했어도 난 다 기억나는데?
- 기억이 안 나요 무슨 얘기 했는지
난 슬쩍 한 발 빼는 걸 택했다
- ㅡㅡ
승현은 본인이 6월 1일부터 사귀자고 나에게 말했고 내가 그러겠다 했다며 우기기 시작했다. 그러니 공사 구분해서 잘 만나보자며 하트까지 날렸다. 웃음이 삐질 삐져나왔다. 마음이 비로소 편해졌다. 이 사람 양아치는 아니네. 나는 승현에게 어서 해장이나 하라고 했다. 그렇게 뻔한 속임수에 기꺼이 속는 쪽을 택하며 우리의 1일이 시작됐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그는 나와 만나기로 한날 고백을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 같아 기다리게 해서라도 만나야 할거 같았다고 했다. 평범한 내가 왜 눈에 들어왔냐 하니 시크한 점이 좋았고 모든 걸 이해해줄 거 같았다고 한다. 난 그렇게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승현은 거의 매일 나를 보러 왔다. 그렇게 하루 걸러 하루 우리 집에 머물더니 이틀에서 삼일씩 지내다 갔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일주일치씩 짐을 싸와 지내더니 빨래를 내 빨래통에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