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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Feb 25. 2021

칭찬은 늘 옳은 것일까?

칭찬과 비난에 대한 명상


"너무 비판을 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어. 기가 죽어서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못했어요." 


저와 대판 싸운 동료 A가 말했습니다. 따뜻하게 도움되는 말을 해 주겠지 기대했다가 저의 직언직설에 뒤통수를 맞은 거죠. 


"집사람은 항상 저를 응원해주는데, 나는 그 칭찬을 들으면 힘이 나요. 비판은 더 듣고 싶지 않아요." 한 달 동안 괴로웠던 A의 말이었습니다. 옆에서 듣던 사람도 "오라버니, 잘하고 있어요. 이 언니 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며 거들었습니다. 성질 더러운 저는 또 열이 뻗쳤습니다. "칭찬 좋아하시네. 칭찬이 뭐, 어~? " 하면서 또 한바탕 해버렸죠. 책상을 탕! 치면서. 


이 일로 저는 오랫동안 저를 돌아봐야 했습니다.



칭찬이 싫었습니다


사실 그날 저는 단단히 삐졌습니다. 속으로 '잘해봐라' 싶었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며,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나처럼 바른말 해주는 걸 고맙게 생각할 것이지. 욕 얻어먹는 걸 그렇게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조언은 대체 왜 구하는 거야?.... 마음속으로 욕을 해댔습니다.


저에게 쎄게 얻어맞고 뻗은 A는 점잖은 사람이었습니다. 더럽고 아니꼬워도 꾹 참고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커피 내렸다며 조심조심 갖다 주기도 하고, 그냥 왔다며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노력이었죠. 저는 어정쩡하게 이중 삼중 포장된 마음과 타협하기가 싫었습니다. 냅다 쏘아붙였죠."왜? 뭐? 뭔데?"  얼마나 사납고 깐깐하고 못되게 굴었던지. 


좋은 말만 하고 싶고, 좋은 말만 듣고 싶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는 노력이 저는 꼴 보기 싫었습니다. 불편한 관계를 못 견뎌서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노력일 뿐 감동할 것도 없다 생각했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만큼 미움과 증오로 돌변하던 인간의 마음, 다시금 사랑을 갈구하는 자기애가 징글징글했습니다. 찬물을 확 끼얹으며 "꿈 깨라!" 하고 싶었죠.


진심도 아닌 말로 반들반들하게 꾸미는 칭찬이 싫은 것이지, 특정 개인이 밉거나 앙금이 남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 비슷한 말을 A에게 했습니다. A는 오래 참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 아이고... 그렇게나 하고 싶은 말 다-아 하고 살면서 무슨 뒤끝이 있겠어요? " 



칭찬하기가 힘들었던 이유


겁도 없이 바른 말하다가 원망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나니 "내가 틀렸나?" 의심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칭찬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칭찬을 하면서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않고,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해주세요." 심지어 속으로는 "할 말이 많지만 내가 참는다, 참아..." 그런 마음일 때도 있었습니다. 속임수였죠. 상대방이라고 그런 제 속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얼굴 살을 덜덜 떨면서 마지못해 칭찬을 했던 저를 돌아봤습니다.


첫째, 내가 욕 얻어먹지 않고 물어 뜯기지 않으려면 좋게 좋게 말해야 했습니다. 다치는 것이 두려워서 "칭찬만 해주세요!" 하는 상대방과, 물어 뜯길까 봐 "어머, 대단해요! 진짜 멋지네요!" 하는 것은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아주 얍삽한 인간관계였습니다. 


둘째, 저의 부모는 칭찬에 인색했습니다. 저도 칭찬에 인색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보고 배운 대로 사는 법이니까요. 저는 칭찬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저를 칭찬하면 매우 어색하고 불편했죠. 그런 만큼 남을 칭찬하는 마음도 궁색했습니다.


셋째, 칭찬보다는 바른 소리 하고 지적하는 것을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되돌아보니 결코 아니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저 사람이 짜증 나고 못마땅했고, 나아가 저 인간을 뜯어고치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래야 불편한 장애물이 사라지고 내가 편해질 테니까요. 현실은 달랐죠. 입바른 말을 하고 나면 편해지기는 커녕 도리어 후폭풍만 일었죠. 저는 어울려 사는 방법을 잘 몰랐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방법도 배우질 못했습니다.


넷째, 상대가 나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도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이라서 더 싫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좋은 말만 듣고 싶고, 칭찬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설혹 그것이 거짓이고 독이 될지라도. 그런 얕은 속을 들킬까 봐 더 화를 냈습니다.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닌 척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남을 칭찬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칭찬해서는 안된다?


칭찬한다는 행위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있고, 그 목적은 상대를 ‘조종’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칭찬해서는 안 된다.

<미움받을 용기 2> 기시미 이치로 외, 인플루엔셜, 2016


저는 칭찬보다는 비난이 더 익숙한 사람입니다. 경험상 비판과 비난은 서로에게 상처만 되고 원수가 될 뿐이었습니다. 인간관계가 너무 고달파서 '칭찬하는 사람'이 되려 했지만, 저는 칭찬도 비판도 폭망이었습니다. 


아들러는 "칭찬하는 방식은 과연 효과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간은 춤추는 고래가 될 필요도 없고, 간식만 주면 "손! 하이파이브!" 척척 해내는 강아지가 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누려야 할 행복은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이니까요. 


인정받는 것에는 끝이 없네. 남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 그로 인해 잠깐은 ‘가치’를 실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거기서 얻는 기쁨은 어차피 외부에서 주어진 것에 불과해. 마치 사람이 태엽을 감아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태엽장치 인형처럼.

칭찬받는 것을 통해서만 행복을 실감하는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더 칭찬받기’를 바라네. 그 사람은 ‘의존’의 위치에 놓인 채로 영원히 갈구하는 삶을,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겠지.



칭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 명상을 하고 또 했습니다.


저는 저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리 굴려 사색한 것이 아니라, 딱 눈감고 앉아 정신 차리고 명상을 했습니다.


첫째, 무슨 마음으로 칭찬을 하는지, 무슨 목적으로 비판을 했는지 숨은 마음을 돌아봤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칭찬과 비난은 모두 숨은 목적이 있었고, 지극히 이기적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높아있고 교만했던 것이 근본 원인이었지요. 사람을 조종하려고 했으니까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마음이었죠.


둘째,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비난을 끔찍하게 힘겨워하고, 남의 평가에 끌려다니는 모습이 모두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꼴 보기 싫고 역겹기까지 했던 상대의 모습이 내 모습임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죠. 그제야 인간에 대한 기대와 실망과 미움이 눈 녹듯 녹아내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짐이 내려놓아졌습니다. 그 짐은 인격에 대한 허영심이었습니다. 그 기대치로 다른 사람도 들볶았습니다.


생긴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 만큼, 상대방을 보는 마음도 편안했습니다. 마음에서 시비가 확 거두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롭던지. 이 마음 제발 오래가라... 싶었죠.


셋째, 칭찬을 하건, 격려를 하건, 충고를 하건 마음속에 있는 것이 터진 입으로 나오는 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재된 마음이었습니다. 

1) 사심이 없어야 욕이든 칭찬이든 진심으로 할 수가 있다. 

2) 진심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신뢰의 또 다른 표현이다.

3) 상대는 그 진심에 귀를 기울인다. 

이 단순한 이치를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관계가 되려면 마음이 담백해야 했습니다. 눈을 흘기며 가시 돋친 말을 해대기 전에, 혹은 이후에라도 자기 성찰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사로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나만 바르고 옳은 척 가면을 썼는지, 일일이 손가락질을 하며 재수 없는 인간으로 살고 있는지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고 뉘우쳐야 했습니다.


‘나’의 가치를 남들이 정하는 것. 그것은 의존일세. 반면 ‘나’의 가치를 내가 결정하는 것. 이것은 ‘자립’이지.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지 답은 명확하겠지.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네.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 특별히 뛰어나지 않아도 자네가 있을 곳은 거기에 있어. 평범한 자신을, ‘그 외 다수’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미움받을 용기 2, 사랑과 진정한 자립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 기시미 이치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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