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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Mar 04. 2024

영화_완벽한 타인

누구나 아프지 않을 권리는 있다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앉아서 보는 게 언제부터인지 힘들어졌다. 집에서 영화를 보다 보면 뭔가 딴짓을 하게 되고 핸드폰을 보게 되고 물 먹으러 가고… 보고 싶어서 결제까지 해 놓고 기간이 지나버려서 못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굳이 영화 채널에서 해 주는 영화 아니면 결제해서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낮에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완벽한 타인’ 영화가 나오는 걸 보고 굉장히 다시 보고 싶다는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완벽한 타인은 이혼 전에 전남편과 봤던 영화다. 그때는 모든 상황이 저렇게까지 된다고? 하면서 재밌게만 봤었다. 그런데 이혼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영화를 다시 보니 정말 영화를 보는 내내 모든 사람에게 감정이입해서 몰입해서 보게 되었다. 더구나 이미 내용을 알고 보니 한 장면, 한 장면이 의미하는 게 보여서 더 재미있었다. 연기자들의 연기는 말해 무엇하랴.


 영화를 볼 때 전남편이 가장 박장대소를 하며 동의했던 대사는 “여자들의 같은 여자들끼리 예쁘다는 기준을 알 수 없다, 재수 없다고 하면 예쁜 거다.”였다. 다시 봐도 그 장면이 웃겼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남편의 와이셔츠에 와인을 쏟아서 화장실에서 부부가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처음엔 남편은 화장실 문 밖에 있는 모습과 화장실 거울에 비친 아내의 모습을 단절되게 보여주다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말을 하며 점점 카메라가 둘을 한 공간에서 잡는다. 세면대에 담가놓은 셔츠에서 와인이 피처럼 번진다. 마치 상처받아왔던 남편의 마음을 표현하듯이…


 영화를 보다 보니 지지리 궁상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저절로 나의 과거가 염정아 님의 역할과 오버랩되어 보였다. (유해진 님도 생김새가 왠지 전남편을 닮은 것 같다.) 정말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아서 보는 내내 감탄을 했다. 바리바리 도시락 싸다 주고 반찬 몰래 갖다주고 이불도 갖다 주고… 친구와 자취하게 된 그 사람에게 이불을 갖다 주기 위해 집 나온 사람처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전철에서 커다랗게 말은 이불을 안고 가던 7호선 지하철 안의 젊은 나는 정말 행복했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중에 연봉 1억을 받는 사람이 된 그 사람은 영화 속의 유해진처럼 오만해지고 오만해졌다. 나는 작아질 대로 작아졌다. 그 사람은 자신이 월등하게 잘해서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고 100% 확신하고 나의 모든 그 사람을 위했던 마음과 행동은 패대기 쳐졌다. 그래. 그 사람 생각이 맞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날 부정하는 사람과 계속 살 수는 없었다. 시댁에서나 그 사람에게나 영화대사처럼 내가 어두워야 다른 이들이 밝아질 수 있다고 참고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게 정말 좋았고 행복했다. 언제부터 우린 변하게 된 걸까. 지질한 씁쓸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역시 난 저렇게는 살 수 없었을 거라 다시 한번 확신했다. 자기 혼자만의 성공. 혼자만의 성취. 난 무임승차한 뻔뻔한 아내. 그럼서로는 부부란 관계로 왜 존재하는가.


 진실은 폭력적이고 무안하다. 마치 팬티를 입지 않은 그녀의 맨 치마 속처럼. 피를 흘리고 울고 소리 지르며 여기저기 생채기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진실 속에서 누군가는 길을 찾기도 하고 누군가는 더욱 심한 어둠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거짓과 비밀에 가려진 현실은 낭만적이고 평화롭다.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영화의 끝 부분에는 하늘에서 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모든 더러운 가식으로부터 감춰준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고 아프고 싶지 않다. 습관적 거짓말쟁이가 아닌 이상 우리는 굉장히 자주 거짓말을 하고 숨기고 살아간다. 나만해도 오늘 나름 친한 언니와 통화하며 얼마나 내 마음을 감추고 그 언니에게 질투도 했다가 화도 났다가 기분이 상했다가 결국 자학개그로 마무리지으며 끊고 나서 이상한 패배의식에 혼자 부르르 떨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모든 나의 마음을 다 말해서 그 관계를 완전 끊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도 그 언니도 적당한 뭔가를 서로에게 감추고 있겠지.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이 될 수 없기에 우린 결국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한 타인일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좋았던 부분이 싫은 부분이 되기도 하고 싫은 부분이 더 커지기도 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믿던 그 싫은 부분은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여러 부분의 말 그대로 한 부분일 뿐이라고 눌러보고 무시하고 참아봐도 어느새 참을 수 없이 추해진 모습으로 날 공격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에게 있는 싫은 부분이 사람마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그 단점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관계를 손절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늘 신경 쓰고 나도 모르게 계산하고 있다. 나 역시 상대방에게 그렇게 계산당하고 있겠지.


 오늘도 내일도. 다른 누군가들을 만나고. 거짓으로 치장한 삶을 예쁘게 걸치고. 기대하지도 말고 기대지도 말고. 가려진 진실 앞에 굳이 서려고 하지 말자. 누구도 아프고 싶진 않으니까. 누구도 자신보다 타인에게 관심있지 않으니까. 거짓된 관심과 대화에 괜히 진실을 섞지 말자. 진실은 눈치 없는 참견꾼일 뿐이니까. 거짓이 대부분을 편안하게 해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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