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롤모델에게서
이직을 한지 어언 1년 6개월이 지났다. 내가 사회에서 만난 어른 중에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 함께 일해보자고 해서 그 꼬드김에 넘어간 것이 계기였다.
야, PD라는 게 뭐야, 네가 원하는 그림과 구성을 직접 만들어보는 거야,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여기서는 해볼 수 있다니까?
지금 생각해도 PD님은 설득의 귀재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지? 본인 말로는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 아닌, 관상을 본다 하던데... 내 관상이 괜찮나? 그렇게 좋은 관상은 아닌데 말이다. 여하튼, 꼬드김에 넘어간 나는 1년 6개월. 피똥을 싸게 된다.
처음 3개월은 정말 죽고 싶었다. 해보던 편집도 아니거니와, 촬영분 4시간짜리를 15분으로 압축해서 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밤을 새본 적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이렇게 운 적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말라본 적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랐다. 무려 초등학교 6학년 몸무게를 찍었다 이 말이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중후하다)
그래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싶었다. 어려운 편집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없었고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프로그램을 참고하려고 해도,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참고하라는 건지... 참고 편집하라는 건가? 새벽은 편집의 시간이 아닌 고뇌의 시간이었다. 그만둘까? 지금이라도 말할까?. 편집기가 아닌 핸드폰을 손에 든 채로 그렇게 몇 밤을 새웠다.
내 첫 결과물은 그렇게 완성되지 못한 채로 PD님에게 넘어갔다. 15분이 무엇이냐, 25분의 장장 긴 러닝타임으로 만든 결과물은 처참했다. 오죽했으면 PD님이 괜히 데려왔다... 싶을 정도? 대신 편집하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편하자고 데려온 건데, 어찌 짐이 하나 더 늘은 기분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그래도 PD님께 아직까지도 참 감사한 건, 이런 짐짝 같은 나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 주셨다는 거다. 일단 '처음' 이니까. 이 변명이 처음에는 아주 잘 먹혔다. 그리고 2번째, 3번째, 4번째...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간 시간들이 모여 시즌이 하나 끝났다. 정말 이때의 기억은 하나도 나질 않는다. 이때 어땠는지, 내가 어떤 생각으로 편집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거를 미화하고 싶은데, 생각이 안 나서 미화가 안 된다. 그때의 나는 누웠다 일어나면 편집하고, 밥 먹다가 편집하고, 커피 마시다가 편집하고, 누구랑 얘기하다가 편집하고. 그냥 말 그대로 편집만 했다. 그때의 시간이 통편이 된 느낌이랄까. 이 부분 재미없으니 날려버리자, 하고 누가 날린 것 마냥.
어영부영 시즌을 마무리하고 새 시즌에 들어가기 전, 일주일을 쉬었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아빠 차를 끌고 혼자 캠핑장에 가서 차박을 했다. 들판이 보고 싶었고 고요함이 그리웠다.
주위는 고요했으나, 내 마음은 시끄러웠다. 가서도 뭔 짓을 했냐면, 프로그램이 잘 되고 있는지 조회수 확인하고 자빠졌었다. 그만해! 안 돼! 하면서도 1시간 마다 확인했다. 왜 조회수가 안 나오는지 댓글은 왜 이렇게 안 달리는지, 하는 걱정만 한 움큼 얹었다. 비루하기만 했던 휴가가 마무리되고, 새 시즌을 맡게 되었다. 전 시즌을 어영부영해냈으니 이번 시즌엔 조금 더 발전된 나!
... 는 없었다. 암 그렇고 말고. 발전되기는커녕 퇴화되어 돌아왔더란다. 오죽했으면 PD님이 물었다. 너 혹시 컴퓨터니? 모든 기능이 리셋된 거니? 휴가 동안 어디 신도림 전자상가 다녀왔니? 아님 용산 전자상가 다녀온 거니?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어영부영 해내 왔던 편집을 깡그리 잊어 아예 편집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자막, 믹싱, 종합 편집, CG 모든 스케줄이 밀려있는데 아무것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나 조차도 놀랄 지경이었는데 보는 사람들은 '어머... 저 PD 맨날 밤새더니 정신을 놨나 봐...' 할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누구? 어영부영의 대명사 아닌가!
또다시 어영부영 회차를 마무리했고, 결과가 다행히도 아주 좋았다. 그러나 결과와는 별개로 나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채로 나온 콘텐츠인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뭐랄까. 일종의 거짓말을 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두고두고 찝찝하고 물컹하다. 또한 이런 기분은 아주 찐득거려서 여러 번 닦아도 지지 않는다. 결국 해결해야 한다. 찐득한 부위에 정확히 비누칠을 하고 물로 씻어 내야 한다. 그 비누칠은 바로 나의 편집 '복기'였다. 휴가 때, 조회수만 보며 슬퍼할 게 아니라, 내가 한 편집을 보며 부족과 개선을 찾아야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래는 나의 부족과 개선을 함께 정리한 글이다.
*주의* 이렇게만 하면 편집을 못할 수 있습니다!
1. 프리뷰 대충 하기
아래 대화는 100% 과장 없는 실화이다.
"이 말 다음에 이 말한 거 있어?"
"제가 다 봤는데 진짜 없어요."
"너 찾아서 나오면 어쩔 건데?"
"진짜 제가 장을 지질게요."
"(바로 나옴) 장 내놔"
"....."
프리뷰는 모든 편집의 생명이다. 이 장면에 이 말이 꼭 필요한데 없는 경우? 절대 없다. 구성에 맞게 촬영을 했다면, 그 말은 반드시 있다. 진짜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면 현장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는 거다. 반성하자.
편집 구성에 필요한 말을 찾는 건, 프리뷰를 얼마나 꼼꼼하게 하느냐에 달렸다. 프리뷰는 시간을 많이 들일수록, 더욱더 좋은 구성이 나오게 하는 지름길이다.
2. 시간 편집하기
A - B - C의 흐름이 있고, C를 강조하는 편집을 해보자. 잘하는 편집자라면, A - B를 편집한 후(니즈를 쌓는 것이라 표현), C가 클라이맥스가 되도록 편집한다. 그러나 나는 어땠는가. C 바로 앞에 있는 장면 만을 가져다 편집했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은 C가 강조된지도 모른다. 앞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편집이 아닌, 시간 단축이다.
구성 편집이란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다. 시청자가 출연자의 행동이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주인공들이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키스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주인공이 똥 싸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해보자. 몰입이 깨진다.
나아가 스토리텔링을 더욱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은, C를 강조할 수 있는 여러 갈래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A - B - C, B - A - C, A - Z - C, C - A - B, 여러 갈래가 나온다. 이 중 가장 좋은 편집은 무엇이냐고? 기억하자. 가장 좋은 구성은 편집해본 후에야 알 수 있다.
3. 말 편집 안 하기
'이것은... 이래서... 그래야만... 왜냐하면... A이다.'
'이것은 B입니다. B는 이렇고 저렇고 저래서 그렇고 그런데 이것은 B입니다.'
나는 이 문장들을 편집 없이 그냥 때려 박았다가 PD님께 1시간 동안 일 그만 두고 싶냐는 말을 들었다.
결국 이 문장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A이다. 중간에 중요하지도 않은 내용을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 간단명료하게 전달해주면 된다. '이것은 A이다'.
친구 주사 중에 제일 싫은 것 중 하나가 바로 했던 말 또 하기다. 친구라도 싫은데 서로 얼굴도 모르는 시청자들은 했던 말 또 하면 얼마나 짜증 나는가. 또 하는 말에 스토리가 없다면 과감히 편집하자.
'이것은 B입니다'.
4. 모든 피드백 다 수용하기
'여기 A가 들어가면 좋을 거 같고, B은 삭제하면 너무 재미있을 거 같아요~'
'B 왜 삭제했어? 그 부분이 제일 재미있었는데...'
피드백은 팀원들에게 '어떤 음식을 좋아해요?' 묻는 것이다. 어떤 PD는 저게 맛있고, 어떤 PD는 저게 맛없고... 그들의 의견을 모두 다 듣다 보면 굶는 수가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번 굶었다가 마감 날이 다가와서야 과식을 해야만 했다.
모든 피드백을 수용할 경우, 결과물은 정말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물론 한 번 더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은 맞지만, 무조건적인 수용은 피해야 한다. 구성안 흐름이 망가지지 않게, 대신 그 흐름에 적절한 조미료를 뿌리며 수용하면 더욱더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야 너 이제 리셋 안 되나 보다?
이렇게 긴 '복기'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야 나는 조금씩 내 콘텐츠에 대해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리셋 안 된 나를 바라보는 PD 님들의 표정에서 나는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갔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콘텐츠에 자신이 없어서 보여주기를 창피해했다. 그러나 수치스러워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더 다듬어지고, 시청자들의 입맛에 가까워지고,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온다. 파도를 엄청 맞은 돌들이 동그라니 예뻐지듯이, 많이 맞고 부딪혀봐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아직도 서툴고 미숙하다. 위 4가지로 압축했으나, 실제 복기 노트에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함께 어려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원칙이 생겨서 지난 1년 6개월 동안 편집한 콘텐츠에 대한 자신이 아주 조금 생겼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빈 깡통 소리만 나던 내게 조금은 묵직한 소리가 조금씩 들리는 것도 같다.
여전히 편집은 어렵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지겹고, 짜증 나고, 화나고, 열 받고, 킹 받고, 재수 없고, 찢어발기고 싶고, 갈기고 싶고, 패고 싶고, 역겹고, 옆차기 하고 싶고, 돌려 차기 하고 싶다. 그렇지만, 재미있다. 내가 어떠한 큰 재능은 없을지언정, 재미있다. 내 기획으로, 내 구성으로 다듬어지는 과정은 참 신기하고 보람차다. 언젠가 너무 지쳐서, 혹은 한계에 부딪혀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때의 내 자세를 기록해두는 것이 훗날 미래의 나 자신에게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위에 썼던 말 중,
'그냥 말 그대로 편집만 했다. 그때의 시간이 통편이 된 느낌이랄까. 이 부분 재미없으니 날려버리자, 하고 누가 날린 것 마냥.'이라고 쓴 게 있다. 그때의 시간이 통편이 되었다고 말한 나.
그런데 그 통편 된 시간은 내게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나에겐 백업 폴더가 있고, 비싼 2TB 외장하드도 있다. 분명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나가 되었다는 걸 안다. 앞으로 어떤 통편의 시간을 쌓아갈 지 무섭고 두렵지만 해보는 거다.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이 편집하며 가져야 할 자세를 단단히 유지하면서. 단, 리셋은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