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니던 시절 담임 선생님들이 내가 속한 반을 맡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대개 나를 옆에서 도와 줄 '착한 아이' 한 명을 지정하는 일이었다. 친구들 몇몇이 약간의 눈치를 보다 자원하는 경우도 있었고, 더러는 선생님이 직접 지정하여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지목의 대상이 된 아이는 대부분 교실 맨 뒷줄쯤 앉는, 반에서 덩치가 좋기로 손에 꼽는 친구들이 대상이 되었다.
이 '착한 아이'가 하는 일이란, 내 수업 준비 또는 화장실 가는 것 등을 돕거나 과학실 · 음악실 등 이동 수업이 필요할 때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 등이었는데, 초중고 시절 친구들의 순수한 우정(?)에만 기대던 일들이 대학교, 대학원에 오면서 그들에게 제도적으로 약간의 금전적 보상을 하는 '장애학생 도우미' 제도로 바뀌었다는 것을 빼놓고는 이 친구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반응은 내가 학교 생활을 한 20여년의 시간동안 거의 비슷했다.
그 친구들과 함께 복도를 지나갈 때면 선생님들은 '네가 많이 애쓰는구나.' 또는 '네가 참 착하다' 등의 말들을 하며 어깨를 토닥이셨고, 때때로 이 친구들은 '휠체어 탄 불편한 친구를 옆에서 도와주는 학생'로 소문이 나서 조회 시간 수백 명의 전교생 앞에서 표창을 받으며 '착한 아이'로 인증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그 친구 사이에는 당초 '담임 선생님의 지목에 의해 맺어진 관계'라는 의식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결국엔 여느 다른 친구관계와 다를 것이 없어졌지만, 학교 생활이 끝날 때까지 누군가의 머리 속에는 '착한 아이'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 시절 내 학교 생활을 옆에서 돕던 선배는 당시 '징애학생 도우미' 활동의 명목으로 받던 약간의 돈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었다. 그 이유란 나의 학교생활을 돕는 사람은 선배 본인뿐만 아니라 당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동료 학우들 모두였으므로, 본인만 도움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나와 그 선배의 관계는 다른 학우들과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내가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둘의 관계를 여러가지의 특별한 말로 수식하게 만들고 있었으며, 우리 외부의 제도적 장치들 또한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평범한 관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특별한 관계로 남겨두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언젠가 우연히 알게 된 이성에게 고민 끝에 떨리는 마음으로 내 감정을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거절이었지만 나에게는 마음이 있던 이성에게 거절당했다는 안타까움이나 쓰라림보다, 약간의 의구심이나 물음표로 남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떨리는 감정 표현을, '나는 네 옆에 있을 만큼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로 거절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를 한번도 착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물론 이성에게 매력을 줄 만큼의 성격적 매력으로서의 착함, 또는 배려심 정도는 충분히 느껴졌고, 그런 것들 때문에 감정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저 거절의 멘트는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었다. '내 옆에 있을 만한 정도의 착함'이란 뭘까?
나에게 너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고, 내 옆에 있기 위해선 그런 '특별한 마음' 같은 건 그다지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약간의 이해와 배려심만 가지면 된다고 그거 네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그의 마음 속에 내가 없다는 우회적 표현인 것 같아 몇 마디 나누다 그만 두었었다. 구구절절하게 장문의 글을 쓰듯 자기변호를 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차라리 마음에 없다는 짧은 말로 끝맺어 주었으면 명쾌했으련만 그의 거절의 말은 나의 머리 속을 한동안 물음표로 가득차게 했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타인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 관계가 직장 동료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혹은 부부건 간에, 개개의 사연은 다를지언정 우리는 그들에게 특별함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별다를 것 없는 자연스러운 관계맺기조차도, 그 위에 장애인- 비장애인이라는 조건이 겹쳐지게 되면, 둘 중 한사람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말이 예외없이 따라붙는다. 게다가 또 다른 한사람에게는 '땡'을 잡은 사람이라는 호들갑과 함께 '감동'이니 '눈물'이니 하는 말들로 '우리의 평범한 관계'를 그들의 '특별한 프레임' 속에 가두어 버린다. 즉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르지 않음을 보이려던 당초의 의도와 다르게 장애인의 옆에 있기 위해선 특별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편견을 오히려 고착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 옆에 있어 대단하고 특별하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나는 네 옆에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을 하는 것과도 같다. 나는 '네 옆의 착한 아이'들처럼 '착하지' 않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