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금 멀리 가본다. 쥴리아 로버츠의 시원한 웃음과 젊은 휴 그랜트의 영화 '노팅힐'의 배경인 노팅힐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본다. Hammersmith & City 라인 지하철을 타고 13개 정류장을 이동 Ladbroke Grove역에서 내려 7분 걸어 두 영화 배경인 서점 'The Notting Hill Bookshop'에 도착한다. 서점 앞은 포토스폿으로 인증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작은 서점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책과 기념품이 가득하다. 책방 앞 거리는 영화 덕분에 관광지가 된 느낌이다. 서점에서 나와 휴그랜트의 파란 대문집으로 걸어가 본다. 거리에 시장이 열리고 시장구경을 하며 지나다 보니 정말 파란 대문집에 사람들이 사진을 남기고 있다. 오늘은 영화를 핑계 삼아 그저 작은 마을을 구경하고 싶었다. 파란 대문집에서 다시 시장으로 그리고 시장 앞 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간단히 먹고 구글지도로 내셔날갤러리로 돌아가는 버스를 검색한다. 23번 빨강 2층 버스를 타고 아무도 없는 2층 맨 앞자리에서 거리를 눈에 담으며 트라팔가 광장까지 온다.
The Notting Hill Bookshop / 파란집
파란 하늘과 햇살 가득한 트라팔가 광장이 오늘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내셔날갤러리로 가기 전에 미술관 바로 옆 세인트 마티 인 더 필즈 교회(St Martin- in-the-Fields)로 들어간다. 18세기에 건립된 첨탑이 있는 이 교회는 1959년 이 교회소속으로 발족된 실내악단 'Academy of St Martin-in-the-Fields'로 유명하다. 이 실내악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무지치(I Musici)와 더불어 바로크 음악부흥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명문악단이다. 지금까지도 활동을 하고 있고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실내악단이다. 런던의 가장 복잡한 거리의 성당이지만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용하고 아름다운 성당이다. 마침 한 남성이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아마도 오후 공연을 위해 연습을 하는 듯, 나는 조용히 들어가 뒷자리에 앉아 연주를 듣는다.
St Martin-in-the-fields 교회
연주가 끝나고 성당 지하로 내려가보니 카페와 선물가게, 티켓판매 오피스가 있다. 'Concerts By Candlelight'라는 음악회가 올 가을, 금요일과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데 내일 10월 21일 모차르트 콘서트를 예매했다. St Martin-in-the-fields Chamber Orchestra의 연주와 St Martin-in-the-fields 합장단의 공연이다. 행운이다.
The National Gallery
어제 내셔날갤러리는 큰 놀라움과 기쁨이었다. 내셔날 갤러리가 소장하는 그림을 공부하고 나름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고의 회화 컬렉션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은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오늘은 어제보다 내셔날갤러리에 입장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다. 30분쯤 기다려 입구에서 가방을 확인하고 2층으로 들어간다. 가장 왼편에 있는 세인즈베리관에서 시작한다.
Sandro Botticelli (Venus an Mars)
중세회화 및 르네상스 회화 전시 중 대부분은 이탈리아 회화들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 (비너스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보티첼리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청년으로 그려진 전쟁의 신 마르스가 잠든 사이 반인반수의 아기 사티로스들이 장난을 치는 모습이 익살스럽다.
Giovanni Bellini (The Doge Leonardo Loredan / The Agony in the Garden)
16세기 베네치아 화파를 대표하는 조반니 벨리니의 '레오나르도 로레다나 총독의 초상'과 베네치아 특유의 색감으로 호소력을 더하는 그림 '동산에서의 고뇌'
Ja Van Eyck 'The Arnolfini Portrait'
북유럽 회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얀 판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사실적이고 정밀한 세부 묘사와 화려한 색채, 완벽한 표현은 하루종일 이 그림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다.
Murillo 'The infant Saint John with the Lamb'
내가 너무 사랑하는 화가 무리요. 세상에서 어린이와 동물을 가장 사랑스럽고 따뜻한 눈으로 그린 화가이다. 이 그림에서 한 소년과 양 한 마리가 들판에 서 있다. 아이는 세례요한이지만 선지자로 보이지 않고 어린아이지만 양을 이끄는 목동이다. 어둡고 거친 들판에 희망을 준다.
Rembrantdt ' Self Portrait at the age of 34'
렘브란트가 최고의 명성과 부를 누리던 시기 1604년에 그린 자화상이다. 이 시기 이후 끝없이 몰락하는 그의 또 다른 자화상의 변화된 모습 역시 찾아볼 수 있다.
Peter Paul Rubens 'Samson and Delilah'
파울 루벤스의 작품으로 가득한 전시실의 가장 대표작인 '삼손과 델릴라'. 배신의 순간을 이보다 생생하고 절묘하게 나타낼 수는 없다.
Piero della Francesca 'The Baptism of Christ'
수학과 신학의 완벽한 조화로 알려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세례'
Diego Velasquez 'The Rokeby Venus'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준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다. 거울을 차용한 구도는 그의 대표작 '시녀들'에서도 다시 나타나다.
가장 보고 싶었던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상 드로잉 '. 유화를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지만 충분히 아름답다. 성 안나는 성모 마리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데 마리아는 성 안나의 무릎에 앉아 있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고 있으며 아기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 이어지는 시선과 모나리자의 미소를 떠올리는 두 여인의 자애롭고 아름다운 그리고 신비한 미소를 언제까지나 보고 싶어 움직일 수 없다.
그 밖에도 너무나 소중한 그림들을 보고 또 보고 마음에 담고 미술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퇴근하는 딸과 오늘의 마지막 일정 사우스뱅크 센터 Royal Festival Hall에서 열리는 London Philhamonia 공연을 보기 위해 간단히 햄버거로 저녁을 먹고 이동한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우승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지휘자이고 영화 '타르'의 주인공이라고 알려진 '마린 알솝'의 지휘로 '랩소디 인 블루' 곡을 연주한다.
발코니 좌석은 처음이었는데 연주자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프로그램 전반부 바버 교향곡 1번은 처음 듣는 곡이지만 인상적이었고 후반부 랩소디 인 블루에서 시각장애인이신 피아니스트의 훌륭한 연주와 마린 알솝의 지휘, 런던 필하모니아의 연주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었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마린 알솝이 '와우!' 라고 외치고 연주가 끝나고 피아니스트를 꼭 안아주는 모습도 감동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사우스뱅크 센터를 나와 템즈강을 걷는다. 어둠이 내린 강은 건물의 불빛으로 반짝인다.
31년 전 일이다. 큰 아이를 임신하고 당시에는 드문 한 달 휴직을 하고 복직을 했으나 부장에게 사직서를 내었다. 사직서를 들여다보던 부장님이 후회하지 않겠는지 물어보는데 나는 당당하게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대학원에 진학해서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대답했다. 마음 좋고 언제나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던 여자 부장님은 나를 보고 '아이를 출산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31년의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가고 나는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지 못했다. 시대를, 당시 상황을, 나의 유약함을 탓하고 싶지 않다. 이루지 못한 꿈은 없다. 힘든 시간에는 그림이 위안이 되고 친구가 되었다. 오늘 이만큼 행복해도 될까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