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한참 늦은 미안함
지금보다는 덜 성숙한 상태로 결혼을 했었는지라 (라고 쓰고) 결혼 초부터, 현재까지 시부모님이 내게 잘해주신 것이 - 친정엄마가 마치 나에게 당연하게 해 주는 것처럼 야금야금 잘 받아먹어 왔다. 결혼 10년이 넘었지만, 그래서 이 베짱이 생활을 이제 청산하려 한다. 왜냐고? 청산을 할 때도 되었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청산까지는 너무 거창하네? 이제 정신 좀 차리고 효도를 하겠다는 것으로 정정하자.
집안 꾸미기에 소질이 별로 없어 신혼집에도 아기자기한 맛이 없는 상태로 그렇게 살았다. 간혹 꾸미기 좋아하고 시즌마다 분위기 내며 사는 친구들 집에 가면 얼마나 부럽고 이쁘던지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기성품을 최대한 이용하여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몄다. 사실 크리스마스트리도 작년부터 처음 사기 시작했다.
이번엔 Edeltanne [전나무과]를 단돈 3만 원에 구입했다. 사놓고 보니 촘촘히 이쁘지가 않아 실망했으나 작년과 비교 시, 1달이 넘어도 쌩쌩하게 유지를 하고 있는 것 보면 선택이 썩 나쁘진 않았다.
대 가족이 아니다 보니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여기진 않으나, 시댁 식구들(5명) 그리고 할아버지, 남편의 이모, 이모부까지 초대를 하다 보니 10명. 몇 달전 우리 집에 동네 사람들을 집안에 24명 초대한 기록적인 역사가 있긴 한데 그때는 식사를 한 게 아니라 음료수만 먹고 서서 있다가 간 자리였다.
그러니...이번 식사준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스위스의 크리스마스 저녁은 집마다 먹는 음식이 다르다. 설날엔 약속이나 한 듯 떡국을 먹는 것처럼 고정적으로 정해진 음식은 없으나 느긋하게 이야기하면서 먹을 수 있는 퐁듀시누아즈(샤부샤부와 비슷)는 그 흔한 메뉴 중에 하나이다. 시댁가족들 역시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직접 고기를 포크에 찍어 익혀먹어야 하는, 즉 비교적 손이 덜 가는 이 퐁듀시누아즈. 매년 크리스마스에 먹고 있기에 나 또한 이 메뉴를 골랐다.
10명이 먹을 고기를 한 번에 주문을 하려고 하니 도대체 양이 얼마나 필요한지 감도 오지 않더라.
물론 그에 따른 고기값은 어떻게, 얼마나 감당해야 하나 싶었다. 더불어 그 10년 동안 시어머니는 이걸 계속 해오셨는데 왜 나는 그리 당당하게도 이 저녁식사에 비용을 한 번도 내지 않았던가 하는 후 폭풍이 왔다. 이렇게 철부지 없는 며느리가 어딨나? 정말 나는 시어머니 = 친정어머니를 동급으로 보고 그동안 지내왔나 싶고, 왜 같이 사는 남편은 그동안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나? 철없는 부부가 바로 여기 있었다.
나는 소고기, 말고기, 송아지고기, 돼지고기 4종류의 고기를 얇게 썰어 정육점에 주문했다. 함께 곁들일 소스도 6가지를 직접 만들었다. 사람이 10명이다 보니 소스도 양을 충분히 만들어야 했는데, 처음이다 보니 이 양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스는 대부분 크림이나 요거트를 적당껏 섞어 농도를 맞추고 그 안에 맛이 나는 것들을 섞어낸다. 고기에 찍어먹을 소스이니 각각의 맛이 확실한 소스였으면 좋겠지만 90세의 할아버지, 70대의 이모를 생각한다면 소스선택에 있어 굉장히 스위스적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어쨌든 이러면서 배우는 거지 싶으며 내가 자초한 크리스마스 저녁을 무려 5일 동안 준비했다. 물론 그 안에 10명이 함께 먹을 그릇과 포크, 나이프도 별도로 샀고 함께 마실 술과 음료수도 샀다. 기왕 초대하는것 제대로 한번 해보고자 하는 욕심이 들다보니 점점 사이즈가 커졌다. 결국 고기 양은 주문한 것에 거의 반절이나 양이 남았다. 계산을 잘 못한 것이다. 가장 인기가 많았던 말고기가 제일 적게 남았고, 송아지고기와 소고기에 밀린 돼지고기가 가장 많이 남았다. 남은 송아지 고기는 락앤락 통에 넣어 시부모님에게 일부를 드리니 굉장히 좋아하셨다. 집에 갈때 음식싸주는 사람은 언제나 옳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저녁식사 준비에 나의 몸은 상당히 고되었다.
다행인 것은 코로나 이후의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나는 것이어서 그럴까? 상당히 분위기가 좋았다. 특히 남편은 가족들을 이렇게 우리 집에 모여 마치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거하게 "대접"할 수 있어 굉장히 설레했다.
매년 크리스마스엔 서로 선물 안 주고 안 받기를 실천했는데 올해 그 기록도 깨졌다. 무려 선물을 1인당 3개씩 준비했다. 그 선물 중 하나는 크리스마스쯤에 먹는 이태리빵 파네토네 [Panettone]인데, 달달한 맛에 서로 주고받기 딱 좋다. 남편의 외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크리스마스 때 이 빵을 1인 1개 주셨다. 그걸 이어서 남편이 이 파네토네 빵을 직접... 구워서 각 집에 1개씩 나눠주었다. 내 주변에 베이킹 좀 한다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우리 집에서 이 파네토네를 직접 구울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이 파네토네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 쿠키를 한 20인분은 구웠다. 버터는 뭐 굉장히 많이 썼고, 계란을 대충 세봐도 최소 60개는 들어간 것 같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음식값도 음식값이지만 처음 치러보는 손님상이어서 그런지 몸이 너무 힘들었다. 특히 손님 오기 전/후 청소 그리고 선물 준다고 오븐 2개를 24시간 내내 돌렸으니 계란값보다 앞으로 날아올 전기세가 더 걱정이 된다. 어쨌든 이번 저녁상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묵묵히 시어머니가 이 걸 해오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감사드리게 되었다. 어쩐지 내가 먼저 "이번 크리스마스엔 저희 집으로 오세요"라고 했을 때 시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나야 결혼한 지 10년쯤 되니까 난 10년 얻어먹었지 시어머니는 대충 세어봐도 최소 30년은 하신걸 세어보니 갑자기 내가 이거 왜 시작한다고 했나 별 생각이 다 들더라.
작년에 결혼한 시동생네 와이프, 즉 동서가 첫 공식 가족모임에 참여했다. 처음 방문하는 것이니 남의 집 주방에 기웃거리기도 그럴 테고 매우 어색하겠지 싶었다. 사실 동서는 3번째 보는 거였는데 나는 그녀를 잘 모르겠다. 그녀는 나보다 5-6살쯤 어리다. 그녀의 목소리나 행동 그리고 직업군을 통합해봤을 때 굉장히 쾌활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잘 나눌 것 같았지만 아직 우리가 시간을 같이 보낸 게 없어 농담 한 번도 건네지 않았다. 게다가 가까이 사는 것도 아니고 차로 1.5시간 거리에 떨어져 사는지라 심리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동생네 가족은 약속 시간이 1시간 30분이나 지나 도착했다. 미리 와서 도와주지라는 생각은 정말 처음부터 정말 없었다. 정말이다. 근데 식사 내내 단 한 번도 자기 의자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치 내가 식당 종업원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는데 어쩜 빈말로도 "도와줄까?" 혹은 자기 먹은 그릇이나 물병정도 옮기는 것 자체를 안 하더라. 물론 동서만 그런 게 아니다. 철없는 시동생도 밥만 딱 먹고 똑같이 한 팀으로 행동했고 그걸 본 시어머니는 눈치를 채신 것인지 묵묵히 일을 다 도와주시고 가셨다.
이날은 우리가 식사를 주최한 호스트이니 남편과 내가 가장 정신없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남편 회사 상사의 가족들을 부른 것도 아닌 가족들인데 아주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는 게 아닌가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나이가 70살이 넘으신 남편의 이모/이모부도 주방에 오셔서 "내가 어떤 걸 도와줄까?" 하고 묻고 가셨다. 외국 사람들은 남의 주방에 오면 뭐 건드리는 거 싫어한다고 하던데, 밥 먹고 내가 먹은 그릇 치우기 혹은 주방 - 식탁상에 그릇 가져다주는 것 정도, 그리고 식탁 치우기 싫어하는 사람 단 한 명도 못 봤다!
내가 그동안 시부모님 집에 가서 잘도 얻어먹었지만 K-며느리 피가 흐르다 보니 적어도 가족들 저녁상에서 만큼은 다 먹은 그릇 정리, 남은 음식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기와 같은 잔잔바리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곤 했는데 이 스위스 동서는.... 정말 밥만 먹고 그렇게 떠났고, 나는 이 시동생네 부부와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정확한 선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