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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Feb 23. 2024

커피를 끊다.

커피를 끊었다. 한 달쯤 되었다.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수면의 질이 자꾸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고(깊은 잠이 들지 못하고, 잠들어도 깨기 일쑤였다) 코로나로 상했던 목과 기관지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당장 운동을 할 수도 없던 때였고, 수면 시간을 무작정 늘리기도 어려운 때였다. 그래서 커피를 끊었다. 끊자, 마음먹자마자 단박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여전히 매일 한 잔의 커피가 간절한 순간이 있지만 잘 참아내는 중이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중독자였다. 한겨울에도 시린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닐 만큼 차고 쓴 커피를 좋아했다. 하루에 두세 잔은 기본이고, 많이 마실 때는 네다섯 잔도 거뜬히 마셨다. 물대신 커피를 마실 정도로 커피를 좋아했다. 아침에 눈뜨면 잠을 깨려고 한 잔, 일과 중에는 피곤을 몰아내려고 한 잔, 커피 향이 좋아서 한 잔, 함께 마시는 사람들이 좋아서 한 잔. 그렇게 매일 수 잔의 커피를 마셨지만 특별히 잠 못 든 밤이 없었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도 없었다.


커피를 너무 좋아했기에 ‘아무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써보고 싶은 욕심까지 냈었다. 심지어 목차도 다 만들어두었다. 아무튼 시리즈를 출판하는 세 곳의 출판사에 투고를 해보려고 기획서도 쓰고 샘플원고도 썼었다.


1. 처음부터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2. 여름날, 카페 컨테이너에 앉아
- 좋은 날, 좋은 사람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3. 아.아.를 마시지만 커피는 잘 모릅니다.
4. 아.아.만이 진정한 디저트 커피
5. 숙취에는 아.아.만한 것이 없다.
6. 네, 제가 바로 얼.죽.아입니다만.
7. 그렇게 좋아하던 것이 한순간에 꼴 보기 싫어지다니
-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입덧
8. 모유 수유 기간에 커피를 마셔도 커피맛 모유가 되지는 않더라
9.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덕분에.
10. 가끔은 곁눈질도 합니다. 아.아.로 돌아오기 위한 잠깐의 여행.
11. 엄마의 취향을 알아는 아이들
12. 죽는 날까지 아.아.를 마시기 위해.


목차를 쓰면서 커피(그중에서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얽힌 수많은 공간들이, 오랜 시간들이, 여러 인연들이 떠올랐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서 쓰지 않은 원고의 목차를 자주 꺼내보며 언젠가는 이 원고를 완성하리라 다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갑자기 커피를 끊다니? 하루에 두세 잔을 마시고도 더 마시고 싶던 커피를 끊어버리다니?


그렇게 좋아하고 즐기던 커피를 끊은 데에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몸을 아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던 때였다. 잠을 자지 못하니 피부도 푸석해지고 화장이 옅어지는 오후가 되면 수정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다크서클이 훤히 드러났다. 두 번째 걸렸던 코로나는 첫 번째와 달리 한 달 이상 항생제를 먹어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쉽게 잠겼고 목의 통증도 오래 지속되었다. 이대로 몸을 방치했다가는 정말 수년 안에 무슨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수시로 텀블러 가득 채워야 할 만큼 좋아했던 커피를 비워내면서. 잠을 더 푹 자기로, 목을 아끼기로. 그렇게 누구도 아껴주지 않는 나를 스스로 아끼기로 결심했다. 나를 아끼는 일에, 커피를 끊는 일쯤이야. 허무하리만큼 쉬웠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당장 없으면 못 살 것 같이 좋아했더라도 어느 순간 잊히듯 끊어지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내가 끊어낸 마음이 비단 커피를 향한 마음일 뿐일까 싶다. 좋아했던 사람들, 좋아했던 대상들. 나이라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때마다 나는 무수히도 많은 것들을 좋아해 왔다.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수많은 것들을. 열렬히도 좋아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많은 사람들이, 대상들이 기억 속에 어렴풋한 조각으로만 남았다. 어떤 이유로, 어떤 계기로 그리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흐릿해졌다. 다만 그들을 좋아했던 마음에 나 자신이 다쳤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아마 이대로 시간이 쭉 흐른다면,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아, 한때 내가 커피를 정말 좋아했었지. 그런데 왜 커피를 안 마시게 되었더라?’ 스스로에게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하나의 좋아하는 마음이 조각난 기억으로 남을지도.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서럽고 서운케 느껴지는 순간도 많지만, 이럴 때면 나이를 먹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싶다. 사십 대가 되면서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좋아하는 마음도 변할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는 것. 그리하여 무언가에 집착하는 마음도 내 안에서 조용히 가라앉히고자 노력할 수 있다는 것.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해치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쓸 수 있다는 것.


커피 이야기를 실컷 썼기에,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불현듯 커피 생각이 절실해질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절실하다.) ‘뭐 이른 시간에 딱 한 잔인데 어때!’ 하며 그냥 한 입만 마셔볼까 싶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꾹 참아봐야지. 여기까지 잘 참고 왔으니까.


너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나를 아끼는 마음이 더 간절한 거니까.

작가의 이전글 일 년 간의 월간지 연재를 끝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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