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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Feb 29. 2024

명함 없는 엄마의 삶이 한순간도 헛되지 않았음을.

아이들과 잠시 외출을 했다가 집 근처에서 꽃 파는 트럭을 발견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간다고 꽃집을 그냥 지나지 못하는 나는 아이들과 함께 트럭으로 달렸다. 집에 프리지어를 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더 반가웠다. 감사하게도 두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한 달에 한 번 꽃꽂이 활동을 한 덕에 꽃에 애정이 깊었다.


“엄마가 각각 2단씩 사줄게. 각자 마음에 드는 꽃으로 골라봐. “

“그럼 나는… 음… 엄마는 어떤 꽃이 좋아?“

“엄마는 저기 노란 꽃이 좋아. 프리지어라는 꽃인데 향기가 정말 좋거든!“

“그럼 난 노란 꽃이랑 저기 하얀 꽃! “

“좋아! 봄이는?”

“나는 이 하얀 꽃이랑 저 파란 꽃!”

“그럼 둘이서 각자 고른 꽃으로 집에 가서 꽃꽂이해보자! “

“응!!”

아이들이 고른 꽃을 한 아름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왔다. 거실 중앙에 신문을 깔고 꽃을 펼쳤다. 아이들은 알아서 작은 꽃병을 찾아와 자리를 잡았다.


“엄마, 근데 가위가 필요할 것 같아. 꽃이 너무 길어.”


어린이집에서 꽃꽂이를 제대로 배워왔구나 싶었다. 두 아이는 능숙하게 가위로 꽃병에 맞게 꽃대를 자르고 잔 잎들을 떼어냈다. 꽃병에 차례로 꽃을 꽂아가는 아이들을 보는데 익숙한 풍경이 겹쳐졌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꽃꽂이를 배우러 다니셨다. 우연히 참여한 초등학교 학부모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꽃꽂이에 입문한 엄마는 꽤 오랜 세월을 꽃과 함께 지난한 삶을 견뎠다. 엄마는 자신의 꽃꽂이 실력이 취미에 불과하다고 단정 지었으나, 실제로 엄마는 꽃꽂이 사범증을 취득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손재주가 뛰어나 꽃꽂이는 물론이고 한지공예로 찻상을 만들고 프랑스 요리 식당에서 요리를 배워 그 시절 우리에게 스테이크를 만들 줄 정도였으니. 엄마는 세월을 잘못 타고나 자신의 재주를 1프로도 펴지 못한 셈이다.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꽃대를 하나씩 꽂는 모습과 지난 시절 엄마의 모습을 겹쳐보며 묘한 향수를 느꼈다. 엄마는 저렇게 차곡차곡 꽃을 꽂는 마음으로 엉켜버린 자신의 삶을 바로 잡는 상상을 했을까. 아니다. 아마 꽃을 꽂을 때 엄마는 오직 꽃에만 마음을 쏟았을 것이다. 꽃꽂이를 할 때 엄마의 표정은 언제나 행복해 보였으니. 꽃 가시에 찔리고 꽃대를 자르는 가위질에 손이 저려도 엄마는 꽃 자체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엄마, 오늘 애들이랑 꽃꽂이했어요. “


엄마에게 아이들이 꽃꽂이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송했더니 이내 전화가 걸려왔다.


“웬 꽃이야?”

“집 앞에 꽃 파는 트럭이 왔더라고. 애들이 어린이집에서 꽃꽂이를 제대로 배워왔는지 가위로 꽃대도 자르고, 잔잎도 다 떼내고 꽂네요.”

“애들 표정이 진지하더라. 애들 정서 발달에도 너무 좋지.“

“그래서 종종 하기로 했어요.”

“그래, 저녁 챙겨 먹어라.”

“네. 엄마도요.”


아이들 정서발달에 좋다는 엄마 말을 들으며, 어쩐지 아이들보다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났다. 엄마도 꽃으로 흐린 마음을 매만져 왔겠구나. 덕분에 지난날, 내 마음에도 그늘보다는 햇살 비치는 날들이 많았던 거구나.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드니까 너무 힘들었지만 도망가지 않았어요.
(중략)
엄마한테 받은 사랑 플러스알파 해서 네 딸한테 줘라. 그럼 허무하지 않냐고 해요. 내 자식인데 뭐가 허무해요. 저희도 열심히 했고 나도 열심히 했으니 후회는 없지.
-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읽으며, 우리 엄마뿐만 아니라 그 시절 엄마들은 그 흔한 명함 한 장 없이 나쁜 일을 파도처럼 맞으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더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에게 받은 사랑을 손자들에게 되돌려주라는 말도, 어쩜 세상 엄마들은 이토록 한결같은지.


더는 엄마가 꽃대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지만, 엄마의 바람대로 두 아이가 꽃대를 꽂는 모습은 자주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받은 향기로운 사랑을

고스란히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고. 그리하여 평생 고단한 삶을 살고도 명함 한 장 없이 노년을 맞이한 엄마의 삶이 한순간도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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