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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r 10. 2024

할머니의 손 따기

2박 3일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던 오늘, 새벽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전날 저녁, 근래에 먹지 않았던 중화요리를 먹어서 탈이 난 것 같았다. 밤새 팔베개를 하고 자는 둘째는 내가 팔을 빼기만 해도 귀신 같이 알고 깨는 터라, 아이를 좀 더 푹 재워야겠다는 생각에 기분 나쁘게 불편한 속을 견디며 둘째가 깨기만을 기다렸다. 부스럭거리며 둘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급격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바로 화장실로 뛰어가 어제 먹은 모든 것을 토해냈다. 열두 시간 넘게 하나도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던 음식의 흔적을 보며 그래도 밤새 아프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나 싶었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죽은 듯이 자다가 토하길 반복했다. 여행의 끝이 너무 처절하다 싶었지만 아이들이 아닌 내가 아프니 차라리 감사한 일이었다. 여행 끝에 아이들이 아팠다면, 여행 내내 좋았던 기억은 흐릿해지고 힘든 기억만 남을 테니. 아파도 내가 아프지!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힘들게 집까지 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며칠 비운 집답게 냉기가 훅 끼쳤다. 보일러를 최대한 높이고 겨우 옷만 갈아입은 채 쓰러지듯 누워 몇 시간을 잠만 잤다. 소화제를 먹어도 한 번 탈이 난 속은 좀처럼 편해지지 않았다. 급기야 눈물이 줄줄 났다. 남편이 등을 두드려주고 팔을 쓸어줬다.


‘아, 울 할머니한테 손 좀 따달라고 하고 싶다!‘

불현듯, 아주 오래전 어느 낮과 밤이 떠올랐다. 어린 날의 조각 기억들이.


어렸을 때부터 위가 약했다. 조금만 부대끼는 음식을 먹어도 배가 아팠고 조금이라도 과식을 하는 날엔 체하기 일쑤였다. 하도 자주 체하니, 어떨 땐 뭔가를 먹으면서도 ‘아, 이거 체할 것 같은데?’ 싶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체해서 구토와 복통에 시달리곤 했다.


체했다는 느낌이 들면, 소화제보다 할머니를 먼저 찾았다. 할머니는 익숙하게 반짇고리를 열어 이불을 꿰맬 때 쓰던 하얗고 굵은 실과 제법 굵기가 있는 바늘을 꺼내셨다. 그리고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듯 앉아 배를 문지르고 등을 두드려주셨다. 한참을 두드리시는 동안 할머니는 마치 당신 속에 무언가가 걸렸다가 내려가듯이 시원하게 트림을 하셨다.


“할머니, 체한 건 난데 왜 할머니가 그렇게 시원한 트림을 해요?”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건 멋쩍은 웃음소리와 또 한 번의 트림 소리뿐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있자면 어쩐지 막힌 내 속이 덩달아 뻥 뚫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한참 동안의 등 두드리기와 배 문지르기가 끝나면 할머니는 나를 옆으로 돌아 앉히고 한쪽 팔을 쓸어내려주셨다.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그렇게 또 한참의 팔 쓸기가 끝나면 처음에 준비해 놓은 하얗고 굵은 실을 풀어 내 엄지 손가락에 칭칭 감으셨다. 손가락 끝에

피가 모여 손톱 밑까지 검붉어지면 바늘에 콧기름을 한 번 쓱 불어넣은 뒤, 엄지손톱 아래 부분을 콕 찌르셨다. 붉은 피 대신 검정에 가까운 피가 봉긋하게 솟아오르면 “아이고, 제대로 체했네” 하시며 자연스럽게 피를 쓱 닦아내셨다. 정말 심하게 체했을 때는 같은 순서로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다 딴 적도 있다. 그렇게 손가락을 따고 나면 진짜로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손 따기는 나에게 가장 최고의 처방전이자 최선의 처방전이었다.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당시의 손 따기가 위생적인지 비위생적인지. 그런 건 나에게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한참을 자란 뒤에도(어른이 되어서도) 속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어린아이처럼 할머니에게 등과 손을 맡겼다. 그때마다 할머니의 손 따기는 마법처럼 나의 체기를 쓸고 갔다. 할머니 말씀처럼 ‘죽은 피(검은 피)’를 빼내어서 그런 것인지, 당신보다 더 자란 손녀의 등을 하염없이 두드려주고 배를 쓸어주신 할머니의 마음 덕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랜만에 지독한 체기에 하루 종일 배를 부여잡고 이리저리 뒹구는 동안, 자주 할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가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실과 바늘을 찾고, 내 몸을 쓸고, 손가락에서 검은 피를 빼주는 상상을. 할머니의 시원한 트림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답답하게 막힌 이 무언가가 시원스레 내려갈 것 같다는 상상도.


할머니의 처방전이 몹시도 그립고 간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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