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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21. 2024

행주를 삶다 마주한 슬픔

얼마 만에 보는 깨끗한 하늘인지! 요 며칠 미세먼지가 최악 수준이라 창밖이 뿌옇다 못해 노란빛이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할 수가 없으니, 이불 빨래를 말릴 수도, 청소를 할 수도, 옷장 정리를 할 수도 없었다. 하다 못해 생선 한 마리 구울 수도, 냄새가 진한 볶음요리나 국을 끓이기도 망설여졌다. 최악인 건 미세먼지인데 마치 내 일상인 최악인 듯한, 무력감을 자주 느꼈다. 아, 주부의 삶이란.     


그러니 어제 종일 내리던 비가 어찌나 반갑던지. 덕분에 예상대로 오늘은 아침부터 공기가 매우 맑다. 얼마 만에 보이는 창밖의 선명한 풍경인지. 여전히 하늘은 구름 가득 흐리지만, 공기가 맑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날이다.     

 

두 아이와 남편을 자전거와 킥보드에 태워 내보냈다. 좋아하는 음악을 모아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고, 춤추듯 이방 저 방을 오가며 모든 창문을 다 열었다. 아, 맑은 공기가 이런 향기를 품고 있었구나. 새삼스럽게 감동하며 어질러진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베개커버를 벗기고 침대 시트를 털었다. 밀린 빨래를 모아 세탁기를 돌리고, 바닥에 있는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꽂고 넣었다.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를 빨아 물걸레질을 했다. 아침 설거지를 마저 하고 행주를 빨아 주방을 닦았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깨끗하게 빤 행주를 냄비에 넣어 식초를 한 스푼 넣고 보글보글 삶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 식탁에 앉아 이 글을 쓴다. 행주를 삶는 냄비에서는 보글보글 끓는 물의 기포 터지는 소리가 난다. 평화롭고 고요한 속에서 불현듯 오래전 어느 날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자주 빨래를 삶으셨다. 내 기억엔 냄비가 아니라 스테인리스로 된 세숫대야 같은 것에 희고 깨끗한 빨래를 넣어 삶으셨는데, 세숫대야일 리는 없으니 큰 냄비였나 싶기도 하다. 그 시절에도 세탁기가 있긴 했는데, 할머니는 대부분의 빨래를 손으로 직접 빠는 것을 선호하셨다. (이건 여든아홉이 되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탁기를 돌리면 물도 많이 쓰고, 전기도 많이 쓰는데 몇 개 되지도 않는 빨래로 세탁기를 돌리려 한다며 얼마나 핀잔을 주셨는지. 덕분에 나는 사춘기를 갓 지났을 때부터 속옷을 스스로 빨아 입었던 기억이 난다.


물과 전기가 아까운 탓도 있었겠지만, 할머니는 기계보다 당신의 손을 믿으셨던 것 같다. 기계가 아무리 잘 빨아준다고 해도 소매 끝, 셔츠의 목선, 작은 얼룩은 할머니의 손길을 따를 수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얼룩진 옷을 입어본 기억이 없는데, 그게 모두 부지런한 할머니의 손길 덕분이었음을 주부가 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손으로 야무지게 빤 빨래 중 일부는 폭폭 삶아야 한다며, 비누 거품을 가득 머금은 채 차곡차곡 쌓여 큰 냄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의 약불 위에서 오래도록 온기와 향기를 풍겼다.


빨래가 삶아지는 동안은 집안의 공기와 향기가 순간적으로 달라졌다. 빨래가 비누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동안 집 안은 온기로 가득 차올랐고, 은은한 세제 향기가 그득히 퍼졌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라 여름에는 갑갑할 정도의 온기였지만,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따사로움에 나른해질 정도의 온기이기도 했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깨 보면 이미 빨래는 할머니의 야무진 손에 깨끗이 헹궈져, 옥상 빨랫줄에서 바람결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요즘 나는 완벽한 주부 모드로 산다. 첫째의 초등 입학으로 육아휴직을 하면서 나의 노동력을 오직 집안일과 두 아이를 돌보는 일에 쏟아붓는 중이다. 매일 아침과 저녁 식사를 집밥으로 준비하고(3월 1일부터 지금까지 배달의 민족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만세!), 매일 청소기를 돌린다.(매일 청소기를 돌리는데도 이 먼지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이삼일에 한 번은 물걸레질을 하고, 책장 위 먼지를 턴다. 적어도 열흘에 한 번은 이부자리를 빨고, 이틀에 한 번은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갠다. 주기적으로 아이들의 옷장을 살피고, 꽃병에 물을 간다. 거의 매일 식재료를 준비하고, 냉장고에 쌓이는 음식이 없도록 관리한다. (그래도 시든 채소를 발견하면 슬프다.) 금세 먼지가 쌓이는 현관을 쓸고 닦는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간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할머니의 생을 자주 생각한다. 요즘 들어 자주 죽음이 다가왔다며, 이제 당신은 곧 할아버지를 따라갈 거라는 말을 하신다는 할머니의 지난했던 생을. 매일 다섯 식구의 식사를 준비하고, 구석구석 살림으로 가득하던 작은 집을 쓸고 또 닦았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부자리를 빨아 새로 바느질을 하고, 기계를 믿지 못해 다섯 식구의 모든 빨래를 일일이 손으로 비벼 빨던. 그렇게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그러다 팔십 년이 지나버린 할머니의 생을.      


행주 삶은 소리와 향기에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여겼다.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리움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가만가만 글을 쓰다 보니 어쩐지 이 감정은 그리움보다 슬픔에, 아득함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저 소리와 향기를 남긴 할머니가 당신 생의 마지막 장면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듯해,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진다. 이건 확실히 그리움보다는 슬픔이다.


앞으로 오랫동안은 행주를 삶을 때마다 아득한 슬픔이 쏟아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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