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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Sep 02. 2024

[20일 차]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

여행의 남은 날이 열흘 밑으로 떨어졌다. 29박 30일을 계획하고 왔으니, 오늘로 딱 9박이 남은 셈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게 아쉽다. 아이들도 집이 그립다고 말하면서도 여행이 끝나는 건 아쉽다며 매일매일 더 재밌게 놀자는 말을 자주 한다.


느긋한 오전을 보내고 아이들의 제안으로 얼마 전에 방문했던 자연생태공원에 한 번 더 들렀다. 두 번째 가봤다고 아이들은 꽤 익숙하게 그곳을 즐겼다. 이런 게 긴 여행의 묘미구나 싶었다. 좋았던 곳을 한 번 더 둘러볼 수 있는 여유, 두 번째 갔을 때는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조금 더 자연스러워지는 마음. 공원에서 돌아오는 길, 함덕 바다나 걷고 가자는 제안을 누가 먼저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셋 중에 한 사람이 그런 제안을 했고, 우리는 진짜로 모래사장만 걷고 오기로 약속을 하고 바다로 갔다. (여벌 옷은커녕 수건 한 장도 없었기에..) 아이들과 그런 약속을 한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왜 또 그런 바보 같은 약속을 했을까. 아이들은 바다를 보자마자 앞도 뒤도 없이 발부터 담갔다.


“엄마, 나 여기 그냥 주저앉아도 돼?”


둘째의 물음에 “안 돼. 수건도 하나 안 가져왔어. 오늘은 그냥 발만 담그자.“라고 답하면서도, 그 말이 허공에 메아리처럼 흩뿌려질 것을 알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둘째는 입고 간 옷 그대로 머리끝까지 입수를 했다. 어찌나 신나게 노는지, 말릴 겨를도 말릴 명분도 없었다. 둘째와 달리 첫째는 무릎까지만 담그더니 이내 모래사장에 앉아 있던 내 곁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너는 안 들어가고 싶어?”

“들어가고 싶긴 한데, 젖는 것도 싫고. 또 안 들어가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봄이 노는 거 보면 놀고 싶지 않아?”

“아니, 괜찮아.”

“엄마는 봄이의 저런 면이 부럽더라.”

“뭐? 잘 노는 거?”

“응, 잘 놀잖아. 엄마든 누구든 눈치 안 보고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면 바로 뛰어들어버리잖아. 너랑 엄마는 비슷한 면이 많아서 하지 않기로 하고 나면 그걸 어기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아.”

“엄마가 먼저 봄이처럼 뛰어들어봐.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엄마도 그런 마음이 막 올라오는데, 엄마는 짐도 너무 많고, 나중에 운전도 해야 하고. 막 그런 생각이 자꾸 드니까 용기가 안 나네.”


한참을 나와 이야기하던 첫째는, 갑자기 어느 순간 비장한 눈이 되어 “엄마, 나 이제 그냥 놀아 볼래.”라고 말했다. 이미 온몸을 파도에 맡긴 채 신나게 놀고 있던 둘째에게로 달려가는 첫째를 보며, 저렇게 자꾸 깨지고 부서져서 나와는 좀 다른 삶을 살았으면, 그런 생각을 했다. 두 아이가 싱그럽게 파도를 맞고 물살을 가르며 뛰는 모습을 보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제주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밤바다까지 보고 늦은 귀가를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밤바다를 보는 게 뭐가 어렵다고 미루고 미뤘는지. 아이들을 제시간에 재우고 내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밤바다 한 번을 못 봤구나 싶었다. 오늘만은 내가 깰 수 있는 틀을 깨 보자는 마음으로 밤바다로 나섰고, 첫째 아이는 제주에 오고 처음으로 “엄마, 나 제주에 살고 싶어.”라고 말했다.





하루 종일 너무 신나게 놀았던지, 아이들은 눕자마자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아이들 방에서 옅게 새어 나오는 ’잠자리 동화‘를 들으며 오늘의 문장을 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문장의 일부이다. ’새는 알을 깨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많이 알려진 이 문장이 오늘 종일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틀이 매우 공고한 사람이다.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고, 루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여행지에서 이렇게 매일 밤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얼마나 지긋지긋할 정도로 규칙적인 인간인지 알 수 있다. 진짜 지긋지긋….) 덕분에 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자주 받는데, 실상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삶에서 안정감을 크게 느낄 뿐이다. 규칙적인 삶은 루틴을 만들고, 그건 끝내 나를 이루는 틀이 된다.


나는 틀 밖이 두려웠다. 굳이 틀 밖을 기웃거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 에너지로 나를 이루는 틀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품어 낳은 내 아이가, 내 틀을 쥐고 흔든다. 내 기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너무나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품어 낳은 또 다른 한 아이는 나와 같은 틀 안에서 그것을 깨고 나가기를 한없이 주저한다. 내가 생각한 틀을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깨부수는 아이를 보는 것도 곤혹스럽지만, 꼭 나와 같은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아이를 보는 것도 편치 않다. 저 아이를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으면서도, 이 아이를 보면 이런 것까지 날 닮나 싶은, 굉장히 모순적인 마음이랄까.


변화를 갈망하며 일상에서 벗어난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왔다. 태어나려면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데, 여행지에서도 나를 둘러싼 세계를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다. 매일 밤 글을 쓰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1일 차의 문장), 아이의 마음으로 살아보겠다고(4일 차의 문장), 변화를 위해 용기 내 보겠다고(17일 차의 문장) 했으면서도 실제 나는 알 속에 몸을 웅크린 채 투쟁하기를 거부해 왔던 것 같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면서도 알을 깨고 싶지는 않은 이 아이러니.


오늘 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깔깔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나를 둘러싼 틀은, 세계는 얼마나 단단한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언젠가는 내가 이 세계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까.

두려움 아닌, 설렘과 기대로 이 알을 깨고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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