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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Sep 03. 2024

[21일 차] 여행은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여행이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아이들은 “엄마,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재밌는 시간은 보통의 시간보다 빨리 간다는 말도, 그러니 지금 더 재밌게 지내야 한다는 말도.(이런 말을 하는 6세 8세 어린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더이상 고행이 아니다. 진짜 여행이다.) 나도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게 아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여행자의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 애쓰지 않는다. 이 여행은 휴식과 여유, 쉼을 위한 것이었지 보고 듣고 배우는 여행은 아니었으므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충분히 늘어지고 충분히 쉬려 한다. 흘러가는 시간에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오히려 ‘진정하자, 그냥 더 늘어져버려!‘ 하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늦은 오후까지 푹 쉬었다. 잘 자지 않는 늦잠을 잤고 늦은 아침을 먹었으며 덕분에 늦은 점심을 먹었다. 잠은 죽어서나 푹 자겠다(?)는 매우 극단적인 생각을 지닌 나에게 늦잠이란 정말 고무적인 일이며, 시간에 맞춰 아이들의 삼시 세끼를 챙겨 먹이는데 이상한 사명감까지 있는 내게 열한 시에 가까운 아침, 세시를 넘긴 점심은 육아 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행이 주는 여유란 이런 거구나, 무엇 하나 애타는 것도 없고, 바쁠 것도 없는 하루를 누리는 것.


오후부터 하늘에 먹색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더니 이내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비 오는 바다나 보러 갈까, 생각하자마자 바로 바다로 떠날 수 있다는 것, 이것도 여행의 묘미였다. 오늘은 어느 바다로 가볼까 하다 월정리 바다가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오늘은 엄마가 가고 싶은 바닷가 카페에 가자고 했다.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좋다고 말하는 아이들 덕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우리는 각자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챙기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수첩도 챙겼다.


월정리 바다에 도착했을 때에도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비 때문인지 바다의 파도는 아주 크고 높았다. 서핑을 즐기는 이들은 꽤 많았는데, 관광객 자체는 많지 않았다. 확실히 성수기가 끝나고 9월이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아이들은 디저트를 먹고 나는 커피를 마셨다. 챙겨간 책은 거의 읽지 못했지만(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놀았고 나는 잠시 창밖을 보며 비 오는 바다를 눈과 마음에 담뿍 담았다. 한 시간 정도 머물렀을까, 조금씩 지겨워하는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제주도가 정말 재밌고 좋은데, 집이 그립기도 하다.”

“나도! 우리 집은 잘 있을까?”


여행이 삼 주째 들어서면서부터 아이들은 간간히 집이 그립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고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며. (가고 싶다고 하면 가라고 할까 봐 그러나.^^) 어쨌든 떠나온 곳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곳이 그리워진다는 것은 슬슬 여행이 끝날 때가 가까워진다는 신호가 아닐까.




충분히 쉬며 여유를 즐긴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의 문장을 쓴다. ‘여행은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행은 떠나는 것 자체보다 일상으로 잘 돌아오기 위함이 목적인 듯하다. 일상이 너무 지긋지긋할 때,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우리는 여행을 꿈꾼다. 떠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훌쩍 떠날 용기를 준다. 여행을 하는 동안은 일상을 잊고 비일상의 시간을 보낸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떠나기 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이 된다. 마음에 여백이 생기기도 하고, 나아갈 희망을 얻기도 하고, 숨 쉴 구멍을 찾기도 하고.


제주로 오기 전, 누구에게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나의 마음은 폐허에 가까웠다. 회복 불능의 상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마음. 이곳에 와서 일상을 잠시나마 잊고 비일상의 순간들을 누리며 정말로 조금 나아졌다. 전혀 궁금할 것 같지 않던, 일상의 안부들이 조금씩 궁금해지고 일상의 공간들이 가끔씩 그립기도 하다. 이 여행이 여행 아닌 일상이 되기를 꿈꾸며 떠나왔다고 생각했다. 막상 돌아갈 때가 다가오니 내가 진짜 꿈꿨던 건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갈 곳이 없는 여행은 여행이라는 단어 대신에 방랑이라는 단어를 쓴다. 내가 정말 바랐던 것은 일상을 버리고 방랑하는 것이 아니라 두고 온 일상으로 무사히,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곳에 남겨둔 사람들에게로, 남겨둔 마음에게로. 안녕히 잘.


남은 일주일 동안 아이들과 나는 최선을 다해서 잘 놀아보기로 다짐했다. 더 재밌게, 더 신나게, 더 편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기로. 이곳에서의 기억이 우리에게 얼마나 특별한 순간으로 남을지 가장 잘 아는 나는, 더 그래볼 참이다. 잘 돌아가기 위해서, 이곳에서 용기를 얻고 희망을 얻고 여유를 얻어, 돌아간 후에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보기 위해서.


몇 번을 생각해도, 참 잘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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