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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Oct 17. 2024

달이 고운 밤, 안부를 전합니다.

To. 밀라노


작가님, 정말 오랜만에 안부를 전합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이곳에도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올봄까지만 해도 시간이 참 안 간다 싶었는데, 제주 여행을 기점으로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아요.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휴직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만으로도 마흔을 부정할 수 없는 나이가 성큼 다가와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부쩍 시간이 빨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난 주말에 <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가 출간되었어요. 어쩌다 보니 책을 네 권이나 썼네요. 첫 책과 두 번째 책의 출간이 마냥 기쁘고 싱그러웠다면, 세 번째 책과 이번 책은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기쁨과 기대만큼이나 두려움과 책임감이 컸어요. 그 때문인지 이번 책의 출간이 가까워지면서부터 정말 한 줄도 못 쓰겠더라고요. 한동안 브런치에도 들어오지 않고, 모든 글쓰기를 잠시 멈추었어요.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고, 아무것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늦은 밤, 운동을 마치고 나오면서 불현듯 작가님께 답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마 달 때문인 것 같아요. 운동을 가는 길에 밤하늘에 걸려 있던 아주 동그랗고 예쁜 달을 보았는데요.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우연히 아주 멋진 달 사진을 또 한 장 보게 됐어요. 하늘에 걸린 달과 휴대전화 속 달을 번갈아 보며,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라는 시가 떠오르더라고요. 작가님께 전화를 드릴 수는 없으니, 더 늦기 전에 편지로나마 안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 시 전문을 소개해드려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리움을, 연정을 직접적으로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말하는 대신, ‘달빛이 고와요’라고 말하는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문득 나쓰메 소세키가 영어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로 번역했다는 일화도 떠오르네요. 그러고 보면 달빛을 보고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 그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 분명한가 봅니다.


저는 달이 참 좋아요. 과학적인 지식과 전혀 별개로, 지극히 문학적인 마음으로요. 매일 조금씩 비워졌다가, 꼭 같은 속도로 다시 채워지고 다시 비워지고 또다시 채워지는 모습도 좋고요. 깜깜한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환하디 환한 빛을 내는 것도 좋아요. 그 빛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은은한 것도, 그래서 고개를 들어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요.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보는 달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함께 본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어쩐지 뭉클합니다.


밤하늘이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달 사진을 찍어요. 휴대전화 속 사진첩을 뒤적여보니 달의 모습이 차근차근 변해가는 게 고스란히 담겨 있네요. 달이 비워지고 채워지며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어요. 어떤 날은 붙잡고 싶고, 어떤 날은 빨리 흘려보내고 싶지만 제 의지대로는 1분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시간이죠. 시간은 오직 제 속도대로, 아주 일정하게 흐르고 우리는 그 시간을 그저 살아내야 해요.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좀 슬프기도 해요. 아프고 힘든 시간은 좀 당겨 쓰고 행복하고 기꺼운 시간은 좀 늘려 쓸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요즘 시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이야기가 자꾸 그쪽으로 흐르네요. 아마 시 읽기 모임 때문인 것 같아요. 2주에 한 번씩 시인과 함께 하는 시 읽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요.(이 가을밤에, 아담하고 아름다운 책방에서, 심지어 오프라인으로요!) 그 모임에서 두 번에 걸쳐 나눈 이야기가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거든요.


우리는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일방향으로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과거에 멈춰 있기도 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곳곳에 과거와 미래가 끼어들기도 하고요. 이 이야기를 한참 하시던 시인님이 ‘크로노스(일상적 시간)’와 ‘카이로스(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의 시간을 이야기하시는데 작가님이 바로 떠올랐어요. 우리가 함께 썼던 <쓰다보면 보이는 것들>에서 작가님이 인용하셨던 시간들이니까요. (떠올랐을 때 바로 답장을 썼어야 했건만….)


저는 요즘 크로노스의 시간을 충실히 사는 중이에요. 운동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고 책을 읽으며 매일 주어진 시간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실히 살고 있습니다. 그 중간중간에 독서모임이나 시 읽기 모임, 그리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같은, 카이로스의 시간들을 누리기도 하고요. 크로노스의 시간은 매일 비슷한 모습으로 저를 채우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가끔 특별한 모습으로 저를 반짝이게 해요. 두 시간을 충분히 누리고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 날들을 보내는 동안, 글쓰기가 카이로스였던 날들은 조금씩 잊혔던 것 같아요. 글쓰기가 마냥 즐겁지 않아서, 점점 무겁고 때론 무서워져서 의도적으로 잊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이 편지를 한참 쓰고 있는데, 작가님의 새 글 알람이 뜨네요. 작가님도 글쓰기가 정말 힘겨운 날들이라고 하셨는데, 저나 작가님이나 결국에는 쓰는 시간으로 돌아오는 걸 보면 어떻게든 쓰는 삶을 살 모양입니다. 이 시기를 잘 넘기고 나면, 다시 글을 쓰는 시간이 우리에게 카이로스가 되는 날이 오겠지요? 특별한 감각으로 오래 남아 ’나‘를 채우는 시간으로요.


우리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계속 쓰기로 해요. 작가님과 함께 쓸 수 있다면, 비록 시간이 조금 더 걸릴지라도 답장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저 하늘에 밝게 걸린 달에게는 이걸 소원으로 빌어야겠어요. 작가님과 제가 오래도록 쓰는 사람으로 살아낼 수 있게 해 달라고요.


그나저나 작가님,

오늘 밤은 달이 참 고와요.


From.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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