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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Nov 13. 2024

불가능의 세상에서 가능성을 말하기

가능주의자(나희덕)

[2024 시 쓰는 가을] 열한 번째 시


가능주의자(나희덕)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오시프 만델슈탐, 「시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조주관 옮김, 문학의 숲, 2012, 96

출처:<가능주의자>


내일은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제가 작년까지 가르쳤던 아이들이 올해 수험생이다 보니 마음이 이만저만 쓰이는 것이 아니네요. 아이들이 너무 긴장하지 않기를, 그래서 작은 실수도 하지 않기를, 열심히 준비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치러내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오늘의 시는 ’가능주의자(나희덕)‘입니다. 불가능이 넘쳐나는 세상,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오죽하면’이라는 심정으로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어사전에서 ‘가능주의자’라는 단어를 찾아봤어요. 역시나 없더라고요.) ‘나’는 ‘꿈’이 ‘산산조각’나는 세상에서, ‘부러진 척추를 끌고‘ 끝없이 가야 할 만큼 극한의 상황에 있습니다.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한 느낌에 사로 잡혀 있어요.


이 시의 백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구가 아닐까 해요. 가능성이 없는 세상에서 ‘가능주의자가 되려’ 하는 마음,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는 마음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생각 덕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사실은 다를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려는 마음 덕분이에요. ‘나’가 바라는, 가능성을 믿고 싶은 일은 큰 것이 아닙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는 작고 소박한 것이에요. 그렇게 작은 불빛으로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 즉 매우 환하고 밝은 세계와 어둡고 소외된 세계에 대해, 그 두 세계가 공존하지 못하고 ’어긋‘나 버리는 것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라 할지라도 끝까지 ’써나가려‘ 해요. 불가능의 시대에 가능을 말하며 찢기고 상처 입은 ‘나’일지라도, ‘나’는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게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지를 알고 있지만요.


내일 수능을 치를 아이들도 모두 저마다의 불가능에 도전하는 심정일 겁니다. 잠을 줄이고 관계를 끊어가며 시험에 매달린 아이들일수록 더더욱 절박한 마음이겠지요. 그들의 절박함을 저도 지나왔지만, 이제는 너무 아득해져서 가늠하기도 어려워요. 아무쪼록 아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으로 제 안의 모든 가능성을 밖으로 꺼내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 생각만으로 이 시를 골랐던 것은 아니에요. 저 역시도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시에 매료되었어요. 이번에 출간한 책 <다정한 교실이 살아남는다>를 쓸 때 이 시에서 자주 위로를 받았습니다. 교육계가 어려워질수록 정말 자주 ’불가능‘을 말하게 되더라고요. 학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꿈꾸는 일들이 과연 학교에서 가능하기나 한 건지. 어떤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내리기 어려웠어요. 뿌연 안갯속에 갇힌 기분이 들 때마다 이 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라는 결연한 시구를 읽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몫을 해내고 싶다. 학교의 가능성을 믿고 싶다’라고 되뇌었어요.


얼마 전에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방영한 학교 관련 보도를 접했습니다. 학부모의 민원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 한 초등학교의 이야기였어요. 그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손이 떨리고 심장이 조여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두려움과 분노, 무력감이 동시에 저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다정한 교실’을 말하고 싶은 저에게 그 프로그램에서 다룬 내용은 충격을 넘어, 제 모든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듯한 공포를 느끼게 했어요. 세상이 이런데, 학교의 가능성을 말한다니, 교실의 다정함을 말한다니.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기까지 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기에 더더욱 학교의 가능성과 교실의 다정함을 믿고 지켜나가야 한다고. ‘가당찮은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능주의자가 되고 싶다고.


그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여전히 학교를 믿고 아침이면 등교하고 수업을 듣고 무사히 하교하는 대다수의 아이들 때문입니다. 여전히 학교에 희망이 있다고, 사랑이 있다고 믿으며 오늘도 출근을 하고 수업을 하고 퇴근을 하는 대다수의 동료 선생님들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에게 학교는 끝까지 ’가능성‘의 공간이었으면 합니다. 어떤 곳보다 많은 ‘가능주의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학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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