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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순간의 다른 말은

딸에게-3

by 진아

봄아. 강원도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밤이야. 종일 비를 맞고 추위에 떠느라 고단했는지 너는 이 낯선 곳에서도 금세 새근새근 깊은 잠에 들었어.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딸아.


오빠의 축구 경기에 쫓아다닌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었네. 그동안 우리 참 많은 곳을 함께 다녔구나. 축구 따라 전국일주야. 그렇지? 오빠를 응원하러 오는 것이 주 목적인 건 분명하지만, 엄마는 너와 보내는 둘만의 시간도 기대하며 매번 짐을 꾸린단다. 물론 우리가 둘이서 다정한 시간을 보낼 틈이 많지는 않지만, 짧은 찰나의 시간도 소중하니까-!


이번에는 이동 시간이 너무 긴 곳이라 너를 데려오기까지 고민이 깊었어. 최소 4시간 이상은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너를 데려 오는 것이 맞나 싶었지. 멀미까지 하는 너를 데리고 강원도라니-! 그렇지만 너를 두고 간다는 건 역시나 말이 안 되는 일이더라. 엄마보다 더 신이 나서 가방을 싸는 너를 두고 가다니!


이번 경기는 거리도 멀었지만, 숙소도 모텔이라 마음이 쓰였어. 모텔에 묵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숙소 선택지가 많지 않아서 좀 오래된 모텔을 예약해야 했거든. 숙소 예약 어플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곳이라 이용 후기도 없는 데다, 업체에서 올린 사진 몇 장도 숙소 전체의 질을 알기엔 부족했지. 불안한 마음으로 도착한 숙소는 아니나 다를까, 낡고 허름해서 꼭 ‘응답하라 1988’을 떠올리게 했지. 그나마 같은 팀의 가족들과 함께 숙박을 하는 터라, 네 또래 친구들이 있어서 마음을 좀 놓았지만, 그래도 삐걱거리는 문과 여기저기 벗겨긴 페인트칠은 엄마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어. 다행히도 너는 친구들과 옆방인 것에 그저 신이 난 것 같았지만 말이야.


어제오늘 이 작은 방에서 너와 함께 잠들며, 엄마는 이십여 년 전의 어떤 밤을 떠올렸어. 엄마가 중학생이던 때였을 거야. 당시에 외할머니는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우셨는데도, 엄마와 이모를 데리고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휴가를 건너뛰는 법이 없으셨지. 엄마가 오늘 떠올린 기억은 아마 전라도를 여행하던 어떤 여름밤이었던 것 같아.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스마트 폰이 있던 때도 아니라서 모텔 같은 곳은 사전에 예약을 하기도 어려웠어. 어느 지역을 여행하던 날이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늦은 밤까지 숙소를 정하지 못해 오래 헤맨 기억은 선명해. 휴가철이라 빈방이 없었던 것 같아. 우여곡절 끝에 방 하나를 잡아 들어갔는데, 그 방은 엄마와 이모, 할머니까지 작은 덩치의 세 사람이 눕기에도 빠듯할 만큼 정말 작은 방이었지. 작기만 했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 거야. 설상가상으로 방문조차 잘 잠기기 않았어. 엄마와 이모, 할머니까지. 겁 많은 걸로는 어디서도 뒤지지 않는 세 모녀는 그 방에서 밤새 피로와 불안에 뒤척여야 했단다. 그 여행의 시작도, 과정도, 끝도 기억나지 않는데, 문이 잠기지 않던 그 밤의 기억만 이토록 선명한 걸 보면, 그 밤이 엄마에겐 꽤 강렬한 기억이었던 것 같아.


어제와 오늘, 이 방에서 잠든 네 숨소리를 들으며 그 밤을 떠올리니 엄마는 어쩐지 안심이 된다. 이상하지? 불안했던 밤을 떠올리며 안심을 하다니. 이런 모순이라니.


어린 날의 엄마에겐 불안의 밤이었겠지만, 지금 엄마에게는 그 밤이 할머니, 이모와 함께 했던 충만한 어린 날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어. 그 어렵던 시절, 두 딸에게 더 다양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하기 때문이지. 잠기지 않는 문이 혹시라도 열릴까 봐 이모와 할머니 곁에 꼭 붙어, 사랑하는 이들의 온기를 느끼며 쪽잠을 단잠처럼 잤던 기억은 이제 짙은 그리움로만 남았어.


이 방에서의 기억은 네게 어떻게 남을까. 너는 그때의 엄마보다 훨씬 더 어리니 아마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장면일 수도 있겠다 싶어. 엄마도 일곱 살 때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니. 하지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는 어떻게든 남으리라 믿어.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기억에 남는 건 아니거든. 머릿속에 기억으로 각인되는 것도 있지만, 피부에 감각으로 깊이 남는 것도 분명히 있어. 엄마는 그런 것이 무척 중요하다 믿는 사람이야. 네가 이 많은 경험들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다채로운 감각으로 네게 남으면 좋겠어. 그 감각이 네 삶을 분명 깊고 넓게 할 테니까.


엄마는 요즘 부쩍 시간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 요즘 엄마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엄마가 감당하기 버거운 것들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엄마는 너와 오빠, 우리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순간들이 너무 귀하고 기꺼워서 이 시간이 조금만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해. 이 시간들이 십 년 후에, 이십 년 후에, 그리고 더 긴 시간 후에 얼마나 그립고 애틋할지가 벌써부터 그려져.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그리움이 미리 피어오를 때면 괜스레 눈물이 나기도 한다니까.


엄마가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이토록 취약한 건, 그리운 것들이 많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야. 그리운 것들이 많다는 건, 기억할 것도 감각할 것도 많은 삶이었다는 거겠지. 그래서 자주 울게 되긴 하지만, 엄마는 네 삶도 그랬음 해. 그리운 것이 아주 아주 많았으면 좋겠어. 좋았던 시간, 돌아가고픈 순간, 생각하면 애틋해지는 날들이 많고도 많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살아본 바에 따르면, 그리운 것이 많은 사람은 현재의 어떤 어려움도 끝내는 이겨낼 용기를 품고 있어. ‘그리운 순간’의 다른 말은 결국 ‘사랑하고 사랑받은 순간’이니까.


내일 오빠의 경기가 무사히 끝나고 나면 우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이번 연휴는 길어도 너무 길다 싶었는데, 막상 마지막날이라니 아쉬움만 한가득이다. 잠들기 전까지 월요일에 유치원 가기 싫다는 말을 하던 너에게 뒤늦은 고백을 하자면, 엄마도 똑같은 마음이란다. 너와 오빠와 셋이서 더 긴 여행을 하고 싶어. 그렇지만! 우린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우리는 이미 삶이라는 긴 여행을 하는 중이고, 그 삶에서 일상을 유지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을 잘 살아내다, 우리 또 어느 날 훌쩍 여행을 떠나자. 그 여행이 오빠의 축구 대회를 응원하기 위한 발걸음이든, 진짜 쉼을 위한 여행이든. 훗날 떠올리면 그리워질 순간을 많이 만들어가자.


이 편지를 쓰며 수십 년 후의 어느 밤을 상상해 봤어. 고단한 하루를 보낸 네가 우연히 이 편지를 읽고, 엄마의

이 밤을 떠올려주면 좋겠어. 언제든 어디서든 우리는 함께였고, 가끔은 서로 찌푸렸지만 대체로 함께 웃고 함께 행복했다는 걸 기억하렴. 엄마가 네게 주고 싶었던 그리움이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감각들로 토독토독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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