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ml 4잔, 퀵타임 해방 치트키
<나의 해방일지>가 열렬히 '추앙받으며' 막을 내렸다. 드라마 자체도 수작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인생드라마 1위 순위를 탈환할 정도로 마음을 건드렸다. 해방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모두에게 있기 마련이라 다들 나름의 생활철학이 켜켜히 쌓여있다. 그렇다보니 왠만한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해방일지구나! 라 느끼기보단, 당연한 소리 하고 있네, 가 되기가 더 쉽다. 개그 꽁트같은거다. 무한도전에서 갑자기 꽁트가 튀어나오면 웃긴데, 개그콘서트에서 자 지금부터 여러분을 웃겨드릴거예요, 라고 시작하면 그래, 어떻게 하나 보자, 이런 심리에 더 재미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대놓고 해방일지를 제목에 내세운 이 드라마는 성공적으로 해방을 그려냈다. 추앙과 환대, 이 다소 관념적인 단어들을 대사로 써놓고도 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단어들을 일상 속에서 구어체로 쓰게 만들었다. 무엇이었을까? 모두의 인생 속에 '구씨' 같은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시청자가 경기도민만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린 것일까?
스물 일곱살 때, 10개월 정도 백수로 보낸 기간이 있었다. 나름 꿈을 펼치겠다고 다니던 직장을 호기롭게 그만뒀는데, 그 당찬 마음이란게 위태로운 줄타기 같아서 하루에도 수 십번씩 불안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스물 일곱인데, 그땐 스스로 나이가 참 많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고 나왔을까 라는 후회와 자책. 내 능력은 여기까지인데 꿈이라는 허상에 눈이 먼 것 아닌가 라는 자기비하. 세상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나만 여기 혼자 멈춰있는건가 라는 소외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생각도 참 여러가지 였다. 그러다 <월터의상상은현실이된다> 이 영화를 보게되었다.
영화는 LIFE라는 유명 잡지사에서 사진 현상을 맡고 있는 40대 미혼남, 월터 미티의 우중충한 일상으로 시작한다. 말 한마디도 시원시원하게 내뱉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주눅들어있는 월터. 그리고 심지어 지독한 공상가이다. 연애는 요원하고 회사에서 짤릴 위기에 놓여있는 상황인데, 속시원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다보니 자꾸만 자신이 만들어낸 공상 속으로 도피한다. 월터의 우중충한 일상과 화끈한 공상의 대비가 이어지면서 현실이 더 시궁창처럼 느껴지게끔 한다. 자연스럽게 백수인 나 스스로의 일상을 마주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 장면일 것이다. 공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그 순간의 희열이란! 스물 일곱 백수는 이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다. 월터 미티에 스스로를 투영해서도 아니었다. 뭔가 한 없이 벅차올랐다. 그저 한 인간이 자유와 행복, 그를 옭아매는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감격스러웠다. 이 장면을 후에 얼마나 많이 돌려봤는지 모른다. 상사가 괴롭힐때, 진행하는 일이 잘 안풀릴때, 누군가와 트러블이 생겼을때...삶이 막혀있다고 느껴질 때면, 4캔에 만원 맥주를 냉장고에 우루루 쏟아놓고 영화 러닝타임 내내 벌컥벌컥 마시고나면 그렇게 시원한 기분이 들 수가 없다. <월터의상상은현실이된다>는 여전히 나의 퀵타임 해방 치트키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물론 <월터의상상은현실이된다>와는 전혀 다른 결의 드라마였지만, 공통점이 있다. '해방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월터 미티는 물론 다소 극단적인 방법으로 (갑자기 그린랜드로 떠난다던가) 어느정도의 해방을 추구했지만, 미정이나 구씨의 해방은 조금 달랐다. 창희와 기정이의 해방도 달랐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해방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다만, 그들이 각자의 우중중한 일상에서 땅만 보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들어 삶의 방향성을 바꾸고, 마음가짐을 바꾸고, 스스로를 귀히 여기며 해방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그것만으로도 시청자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해방의 힘인 것 같다. 궁극적인 해방이라는 것을 이루는 것보다는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해방을 계속해서 추구해나가는 건강한 삶의 방향성...자세를 갖추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게 하는 것! 활짝 웃은 미정이의 미소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 월터 미티의 당찬 얼굴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나로 하여금 힘차게 삶의 전방을 바라보게끔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