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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ra Sep 02. 2019

24 : 무심함

연애 에세이 : 상처를 대하는 자세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24. 무심함     

연애 에세이 : 상처를 대하는 자세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고통. 삶이 고통 없이 지속될 수 있을까.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행복만 있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웃음만 있는 나라가 있다면, 웃음 나라 주민들의 집에는 시꺼먼 덩어리를 숨겨 놓은 상자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본다. 유독 웃음이 많고 긍정적인 사람을 보면 가엾다. 슬퍼하는 사람보다 감정을 내보이지 못하는 사람이라 억지스러워 보일 때가 있어서. 드러내지 못한 슬픔이 분명 자리 잡고 있을 텐데. 그 중의 몇몇은 고통을 딛고 일어난 사람도 있겠지.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그처럼 밝고, 에너지 넘치고, 아름다울 수 없을 테니까.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빛날 수 있는 이유처럼 어둠이 있기에 빛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소설 한 구절을 읽었다. 아이가 악을 쓰며 소리치는 구절이었다. ‘가지마. 가지마아아!!, 가지마아아아아!!!!’ 길 위로 흩어지는 소리 들이 주인공에게까지 가닿았다. 주인공은 생각했다. 이 아이도 10년 15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슴에 구멍은 남겠지.’     


 하교 시간이 지난 학교. 적막이 흐르는 교실 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공기. 세 명의 어리디 어린 소녀. 한 소녀가 값싼 나무로 된 책상 위, 예쁜 포장지로 싼 고무판을 바라본다. 그 시절 소녀들 사이에선 고무판을 포장지로 싸는 것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듯한 자연스러움이었다. ‘쓱’ 금이 간 포장지. 그 밑으로 상처 난 고무판. 아무렇지 않게 다시 ‘쓱’. 몇 번의 칼질은 책상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다. 칼질하던 소녀는 다른 두 소녀를 불러 상처 낸 모습을 자랑스럽듯 보여줬다. 세모난 또는 네모난 포장 종이들이 흩뿌려져 있었고, 초록색의 고무판이 성이 난 듯 살 같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칼로 쓰인 글씨가 강렬히 눈에 들어왔다. 같은 반 여자아이의 이름, 하트, 다른 반 남자아이의 이름. 


 다음날. 웅성거리는 교실. 반의 모든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 서 있다. 둘러싼 중앙 안쪽으로 두 명의 소녀. 서 있는 소녀와 무릎 꿇은 소녀. 찢겨진 고무판의 주인인 소녀가 손을 올려 무릎 꿇은 소녀의 뺨을 억척스럽게 때렸다. ‘착’ 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웅성거리던 교실은 어떤 소리도 머금지 않았다. 고무판 때문이었고, 고무판에 새겨진 글씨 때문이었다.     


 “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야기해줄까?”

 “뭔데?”

 “친구한테 뺨 맞았었어.”   

  

 늦은 밤,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그와 통화하다 문득 주제가 그렇게 흘러갔는지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가 대답했다.     


 “응.”


 그의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잠시, 당황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응’이라고? 그의 무심한 한마디에 멍해졌다. 내가 생각했던 대답은 ‘진짜?’‘왜?’‘뭐 때문에?’ 등의 말이었다. 그런데 ‘응’이라니.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나의 치부를 덮은 이끼를 벗겨내려 하는데 돌아온 대답은 겨우 ‘응’. 짧은 정적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10살이 겪기엔 혹독한 경험이었다. 다음날 고무판에 칼질한 친구가 학교에 먼저 도착해 거짓말을 해놨었다. 해명할 틈도 없이 내가 범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많은 친구들 앞에서 억울한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어리석게 알면서도 감싸줬다. 선생님에게도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엄마끼리도 아는 친한 친구였으니까. 지지리도 멍청했다. 그때부터 친구 관계, 사회적 관계들에 민감해졌다. 표출되지 못한 분노는 아주 잘 자랐다. 치유되지 못한 앙금들이 쌓이고 쌓여 밖으로 나가지 못해 헤매니, 썩어갔다. 10살 소녀가 책상에 앉아 분노를 억눌러 눈물을 토해내며 일기를 쓰는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괴로움의 나날들이었다.     


 “누명 씌웠었어.”

 “그래.”     


 더 설명할 수가 없었다. 풀어내려고 했던 말들을 주섬주섬 담았다. 이런저런 말을 해주려 했는데, 그가 받아주길 바랐는데, 서운함이 밀려왔다.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다. 화제를 돌려 대화를 하다 그와 전화를 끊었다. 천천히 몸을 눕혔다. 이불을 움켜 안고 생각했다.     


‘내 말이 잘 전달 된 건가.’

‘더 말하지 않은 게 나은 건가.’

‘그 일이 별 게 아닌가.’

‘나한텐 굉장히 큰일이었는데.’     


 조용히 생각이 흘렀다.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그 일이 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반복되어 올라왔다. 방이라는 작고 네모난 공간 속에서 미동도 없이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잠잠해졌다. 어지럽던 머릿속이 정리되자 이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고맙단 생각 마저 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지 않아도 되어서였을까. 희한했다. 차분히 시간이 지나자 서운했던 ‘응’과‘그래’가 마치, 괜찮다고. 누구나 상처는 있는 거라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덥혀 있던 이끼 속 그 모습 또한 좋다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넣어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기대했던 반응대로 흘러갔다면 어땠을까? 심리적으로는 묵힌 감정을 풀어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아마 나는 다시 초등학교 3학년의 나로 돌아가 슬픔에 잠겨 헤매었을지도 몰랐다.     

 눈커풀이 무거워지고 마음이 가라앉자 어느새 그의 무심함이 울렁이던 심장을 살며시 감싸 안고 있음을 느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온기로.




무심한 위로를 받아보니 알 것 같네요.
혹시 누군가 당신에게 위로를 원한다면 그냥...들어주세요.
그 사람의 진심은 조언을 얻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요.
아무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일도 아닌 것 처럼
누구나 한번쯤 겪는 상처. 그랬구나 하고 잊을 수 있도록.
그랬구나하고 그저 토닥토닥 안아주세요.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출간된 에세이 책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토대로 자아와 인생의 성찰을 보여주는 인문학적인 사랑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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