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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ra Sep 03. 2019

25 : 보라

연애 에세이 : 과거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25. 보라        

연애 에세이 : 과거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



       

 빨강과 파랑이 섞인 보라색.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중간. 보라색이란 명칭은 누가 지었을까. 그 많은 이름 중에서 하필이면 왜 보라일까.     


 20살 초반까지 내 이름은 ‘보라’였다. 이름을 바꿨다. ‘재희’로. 친오빠 이름이 ‘재’가 들어가서 ‘재’를 따라 썼다. 나만 빼고 오빠와 사촌들의 이름은 다 ‘화’자 돌림이다. 나만 특별한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리 특별하지도 않았다. 유치원을 지나 초등학교에 가니 같은 이름의 친구가 있었고, 중학교엔 ‘보라’가 3명. 고등학교에도, 대학교에도 ‘보라’가 있었다. 사회에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는데도 ‘보라’와 함께 일했다. 티브이를 보는데 연예인 이름도 ‘보라’ ‘보라’ ‘보라’. 세상에 ‘보라’가 너무 많았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에게는 아군과 적군이 있었다. 적군을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신기하게 뒤에서 나를 뒷담화하는 친구들이 꼭 있었다. 나와 단짝친구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거나 내가 친하게 지내는 무리에서 나를 빼내려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 관계가 힘들기보다 참, 피곤했다. 내가 만만했나. 그런 사춘기 시절은 폭풍 같은 날들이었다. 엄마와의 싸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되는 것이 많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적은 나이였다. 20살 이전의 ‘보라’는 ‘성인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꼭 스스로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할 거야’라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할만한 건 다 해봤던 것 같긴 하다.


 포부가 강한 만큼 나만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싶었다. 이름부터가 신경쓰였다. 어릴 적, 관계의 차가움을 강하게 겪어서일까 ‘보라’라는 이름에 파랑색이 더 많은 것 같다 생각했고 이름을 바꾸고 싶어졌다. 직접 짓고 싶어 23살의 보라는 작명소를 찾아갔다. 철학관 선생님은 사주 풀이도 해주시면서 바꾸고 싶은 이름을 정해오면 그것에 맞게 한자로 지어주시겠다고 했다. 엄마에게 말했다. 작명소를 다녀왔다고, 사주 풀이를 하니 이름을 따뜻하게 바꿔주면 좋다고 한다고. 엄마는 이유를 물으시며 황당해하고 어이없어하셨지만 나 대신 아빠를 설득해주셨다. 이쁘게 지어준 이름을 바꾸려는 딸을 보며 속이 많이 상하셨겠지. 그래도 허락하며 말해주셨다. 원래는 우리 집안이 ‘화’자 돌림이니 ‘수화’라는 이름으로 지어주려 했었다고. 그러다 할아버지의 권유로 나만 한글 이름을 갖게 된 거라고 하셨다.     


 ‘재희’가 되고 처음부터 큰 변화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따뜻함이 묻어났고 내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주변에 재희라는 이름의 사람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고 간혹 만나더라도 내가 지었기 때문인지 개의치 않았다. 신기하게 반가울 때도 있었다. 부모님도 바뀐 이름으로 불러주셨고, 철없는 딸의 강단을 이해해주시니 죄송하면서도 감사함을 느꼈다. 그런 사소한 기쁨과 따뜻함이 모이자 나는 점차 마음가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좁았던 마음이 조금씩 넓어지는 듯했고, 항상 닫았던 문을 열기 시작했으며 타인에게 받았던 상처에도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이름은 불러주면 효력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을 별 의미없이 받아들이며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한 사람을 나타내주는 가장 첫 번째 표현 방법이자 인생에 있어 중요할 수밖에 없는 표식 같은 것이다. 한 평생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어질텐데 이름을 바꿈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생긴다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나는 ‘보라’의 나날보다 ‘재희’의 나날들이 더 좋았다.     


 그에게 내 예전 이름을 말해주니 가족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실은 친구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왜 바꿨냐며. 나는 ‘사주 풀이도 그렇고, 같은 이름이 너무 많았고, 나만 돌림자가 아니라서’ 하고 답해줬다.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진짜 하나밖에 없어.”

 “진짜?”

 “아, 목포에 한 분 계신다.”

 그의 이름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에 신기했다. 그도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고 했다.

 “보라 이름 이쁘다.”

 “나는 그냥 그래. 싫지도 좋지도 않아.”

 “왜?”

 “그때 보다 지금이 더 좋아.”

 “보라야~~~”

 그는 그래도 좋다며 ‘보라’라고 불렀다. 자꾸 불렀다. 지금도 가끔 부른다. 그가 개인적으로 하는 게임 캐릭터도 ‘보라’라는 이름을 붙여놨다. 그의 핸드폰 이름에도.     


 나의 추억 속 ‘보라’는 불쌍하고, 안타깝고 바보 같았던, 한심하고, 난폭하고 이기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가 불러주자 ‘보라’는 보듬어지기 시작했고 파랑색보다 빨강색이 조금씩 더 섞여갔다. 그럴수록 나도 점점 생각이 바뀌었고 애틋해졌다. 가끔 잊고싶던 날들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기는 했지만 이상하리만치 괜찮았다. 그가 말했다.     


 “보라도 너잖아.”     





좋지 않은 축억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지난날이 불행했다 생각한다면
분명, 나의 과거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싶을만큼 싫을 거에요.
그래도 이것만 생각해보세요.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은 밟아왔던 길이 있다는 것이고,
그 길이 나를 만들어왔다는 것을요.
지난날의 내 모습도 인정해줘야 진정한 ‘내’가 됩니다.
거창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내 인생에선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그 길은 스스로가 만들어온거에요.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출간된 에세이 책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토대로 자아와 인생의 성찰을 보여주는 인문학적인 사랑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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