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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ra Sep 21. 2019

35 : 꼬인 매듭

연애 에세이 : 익숙해진 편안함 때문에


에세이 글 읽으시기전 알립니다.

안녕하세요. 브런치를 제대로 시작한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감사하게도 저에게 뜻밖의 좋은일이 있었습니다. 다음 메인 화면 '브런치' 부분에 '꼬인매듭' 글이 노출되었더라구요.























갑자기 올라가는 조회수 때문에 어떤 경로인지 찾아보아 보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노출된 경위는 모르겠으나 처음 있는일이라 새롭고 재미 있었습니다. 2천이 넘는다는게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닐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에겐 큰 의미였고, 글을 읽으신 분들에게 작게나마 좋은 영향이 있었길 바래봅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35 : 꼬인 매듭        

연애 에세이 : 익숙해진 편안함 때문에



 어릴 땐 조용하게 말썽 피우는 착한 말괄량이였던 것 같다. 소리도 없이 빨래 바구니에 들어가 장난을 치기도 하고, 엄마 립스틱을 바르기도 했고, 잠깐 외출하셨을 때 몰래 엄마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걸어보기도 했었다. 웃음 많고 활발했던 아이였다. 그런 나는 태어나자마자 잔병치레가 많았다. 배가 아파 뒹굴었던날 나를 업고 뛰었던 엄마. 혹시라도 아플까 항상 아침밥을 챙겨주셨고, 끼니를 거르진 않을까 마음 졸여 하셨다. 아빠는 술에 취한 날이면 잠들어 있는 딸 방에 들어와 뽀뽀를 해주셨다. 지금은 담배를 끊으셨지만, 그 어릴적 아빠의 스킨 냄새와 담배 향은 아직도 진하게 남아있다. 엄마의 품과 아빠의 향은 사랑이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를 마치니 그가 물었다.

 “엄마한테 하는 말투가 왜 그래?”

 “뭐가?”

 “사납게 말 하자나.”

 “아닌데, 원래 그래.”

 “원래?”

 “그냥, 털털한 거라고.”


 어릴 적부터 너무 일찍 사회의 불안정성을 느낀 꼬맹이. 그나마 초등학교 시절엔 괜찮았는데 중학교를 올라가 사춘기가 되어서는 더 심해졌다. 내 몸에 가시가 자라니 엄마에게 뱉는 말들에 모두 가시가 달려 날아갔다. 심할 땐 서로의 마음을 물어뜯으며 싸웠다. 그게 익숙해지자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에게 향하는 말투는 비슷했다. 원래 그래가 되어버린 말투. 그는 황당해하며 지적했다.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자연스럽게 툭툭 던져지는. 부드럽지 못하고 날카로운. 그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익숙했던 말투였다.


 “나중을 생각하니 무섭다.”

 “뭐가 무서워?”

 “가족한테 하는 모습이 아내의 10년 후 모습이랬어.”

 “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아니야, 아빠랑 오빠한테는 안 그래.”

 “근데 엄마한텐 왜 그래?”

 그러네, 생각해보니 엄마한테만 그러네. 나는 방어하며 부정했지만,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관계의 문제야.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느냐의 문제야.”

 “왜 관계의 문제야?”     


 태어날 때부터 나쁜 감정을 받아오며 살아오지 않은 이상 처음부터 가족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뭣 모르던 유아 시절이 지나고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엄마는 내가 잘못할 때면 사랑의 매를 드셨다. 엉덩이가 짝궁둥이가 되도록 맞았다. ‘그래’라는 긍정의 말보다 ‘안돼’라는 부정의 말을 더 많이 들어왔다. 걱정이 수없이 많은 엄마는 끝없는 잔소리를 펼쳐놓으셨다. 걱정이 산처럼 쌓여가니 믿음 받지 못하는 아이인 것 같았다. 한편으론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 같기도 했다. 가뜩이나 친구관계도 어려워했으니 힘든 마음은 배가 되었었다.     

 

 “엄마한테 말 좀 이쁘게 해.”

 “노력해볼게.”     


 그가 우리 집에 들르는 일이 많아지니, 나와 엄마의 대화도 많이 듣게 되었다. 그는 엄마에게 하는 나의 말투를 들었을 때 지적했고,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또 지적했다.


 “내가 눈치 보이잖아. 그냥 수긍하고 이쁘게 말해. 현명했던 네 이미지가 다르게 보이잖아.”

 “노력하고 있어. 사람이 어떻게 쉽게 변해, 천천히 달라지지.”


  그의 말이 조금은 슬펐다. 이런 모습도 나인데, 이런 모습은 인정해 줄 수 없나? 그의 앞이라고 순간의 가식을 부리고 싶진 않았다. 내가 그의 생각을 못 했을 때도 있었다. 굳이 사위가 될 사람 앞에서 엄마와 토론하듯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내 삶을 살아본 것도 아니면서,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본 것도 아니면서 이해해주려 하지는 않고 눈치 보인다는 이유로 나를 나무라는 게 싫었다. 나는 쌓여온 익숙함으로 대화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화를 낸 것도 아니었다.     


 이해한다.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느리긴 했어도 오래전부터 노력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내 스스로 잘못된 부분을 고치기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지난 과거의 과오들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내 안에서 거름망으로 찌꺼기를 걸러내듯 쌓여온 감정들을 걸러내고 씻어내야 한다. 한 번은 엄마와 예전의 힘들었던 과거를 풀어내려 했지만, 서로의 감정만 토로 했을 뿐 위로가 되어주진 못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였을까. 부모님이 말하기를 그를 만나고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실은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사람은 주관적인 시선에 갇히면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이 생각한 것에만 파고들어 간다. 나에겐 그 시선이 가족을 향해있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했다. 아마도 그 역할을 그가 해준 듯했다. 그래도 근 기간 안에 변화된다는 거 힘든 일인데. 어느 누가 지적을 하더라도 그것이 비난섞인 마음인지 따뜻한 마음에서인지는 듣는사람은 느낄 수 있다. 그가 나에게 지적은 했지만, 그의 지적은 후자였다. ‘그래, 너 원래 그렇구나’가 아니라 더 좋은 모습이길 바라는 더 나은 모습이길 바라는 그 마음에서였다. 나를 이해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의 그 마음 고스란히 전해져 내가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그란 사람의 온기가 점차 안정감을 가져다주니 나는 그를 발판삼아 지난날에 머뭇거리던 용기를 쉬이 낼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지적을 반는 것은 그리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열고 다시한번 되돌려 자신을 바라본다면 한단계 성장 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마련 할 수 있다.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 부모님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었음을 자식과 가족을 위함이었음을 이제야 한걸음씩 깨달아간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발자국을 따라 검은 물빛을 드리운다. 입에 쓴 약은 몸에 좋다 하였다.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때로는 쓰디 쓴 지적도 달게 받아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 하지 않을까.               





가족뿐 아니라 모든 관계 안에서 사람들은
주관적인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봅니다.
너무 가깝거나 너무 익숙하거나 너무 편안한 둘레 안에서는
볼 수 있는 것 보다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익숙해진 편안함 때문에 보고싶은 것만 보고 있다면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봐 보세요. 객관적으로 바라봐 보세요.
잠시 연락을 끊어봐도 좋고, 잠시 침묵해 봐도 괜찮아요.
방법이 어떤 것이든 스스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주관 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출간된 에세이 책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토대로 자아와 인생의 성찰을 보여주는 인문학적인 사랑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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