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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숩숩 Mar 17. 2018

빨강, 기억, 유령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시리즈 2017 : 임흥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벼르고 있던 전시였다.


연이어 흥행을 터뜨린 국현X현대차의 네 번째 콜라보 전시라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이라는 굵직굵직한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것도 할머니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다.


하지만 그 각오가 무색하도록 전시장 안에서 마주한 화면은 너무 무거웠고, 생각치도 못한 공간 구성에 숨을 훅 들이켜야 했다. 살짝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와닿던 연출은 이렇게나마 할머니들이 겪었던 감정을 체험해보라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친일과 항일, 민주와 공산, 남한과 북한, 삶과 죽음. 전시는 말 그대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 대해 묻고 있었다. 임흥순 작가는 믿음, 신념, 사랑, 배신, 증오, 공포, 유령이라는 단어 7개를 전시의 부제로 삼았다. 나는 빨강과 기억, 유령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이번 전시를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할머니들의 유품을 전시한 마지막 공간 (출처: MMCA 페이스북)




#1 빨강

어떤 사람은 내가 빨간색 좋아한다니까 내 사상을 생각하던데 그거는 전혀 관계없어요.
어렸을 적부터 쭉 빨간색을 좋아한 것 뿐이니까요


열한 살 때였나. 제주 4·3 사건을 다룬 동화를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붉은 유채꽃>. 다시 검색해보니 분명 붉은 기라곤 없는 표지인데, 왜 아직까지도 새빨간 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 건지. 책 속 학살에 대한 묘사가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밭을 일구며 평화롭게 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별다른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풍경이 내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전시는 지하의 5전시실과 7전시실에서 열리고 있었다. 온통 흰 벽으로 둘러싸인 입구 너머의 세상은 여느 때와 달리 어두컴컴했다. 조심조심, 한 발씩 내딛던 내 눈앞에 등장한 것은 착각 속 이미지만큼이나 새빨간 사천왕상이었다. 왠지모를 오한과 경외심,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속으로 '괜찮아... 일단은 미술관이잖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 좁은 통로를 통과했다.


와, 그랬더니 펼쳐진 이세계. 이 넓은 전시실을 가벽 없이 통째로 쓰다니. 작가의 대담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길다란 한쪽 벽에는 스크린 3개가, 마주보는 벽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한 쌍의 계단이 놓여있었다. 탁 트였지만 어둡기는 매한가지라 역시나 더듬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영상이 막 시작되려 할 때였다.



서울박스 <할머니가 구한 나라> 설치 장면 /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영상 스틸 컷 (출처: ARTBAVA)


사실 영상에는 빨간색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산이 주요 배경이라 오히려 초록색이 더 많이 나온다. 하지만 드문드문 등장하는 빨강의 존재감은 아주 강렬하다. 피와 빨치산, 그리고 휘날리는 성조기와 태극기의 빨강.


빨강은 본능적으로 가슴 속 무언가를 끓어오르게 하지만, 동시에 머리를 차갑게 얼리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공산주의와 연결되었을 때 바로 그렇다. 쉽게 꺼낼 수 없는 그 단어, 빨갱이.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이 '사건'이든 '항쟁'이든, red island가 정말로 red island가 되어버렸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각각의 red가 무엇을 의미하든 사회는 쉬쉬한다. 작가는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라는 듯 다시 한 번 빨간색 글씨의 제목으로 영상을 끝맺는다 -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2 기억

역사가 하얗고 까맣고 단절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강렬하고 자극적인 빨간색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전시와 팜플렛 디자인의 메인 컬러는 노란색이었다. 여기에 국화를 형상화한 듯한 자수 꽃무늬까지. 나는 이걸 멋대로 추모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해석했다.


전시실로 입장하기 전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빨간색으로 칠해진 서울박스를 지나 5전시실 앞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복도를 가득 채운 거대한 연표였다. 영상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은 총 넷, 연표에 그어진 색색의 가로선도 넷, 거기에 중앙의 검은 선을 더해 총 다섯. 1900년부터 2000년까지 이정숙, 고계연, 김동일, 정정화 할머니의 인생사가 '세계대공황(1930-1936)', '엘리뇨(1940-1942)', '개기일식(1948)'처럼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커다란 사건들과 함께 전개된다. 앞으로 만들어질 장편 영화의 대사들이자, 할머니들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말들은 19로 시작하는 시간축에 정렬되어 하나의 역사처럼 다뤄진다. 아니,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의 기억으로 쓰여진 여러 개의 '사적' 역사다. 


"이렇게 서울을 내버리고 도주했던 자들이 9·18 수복 이후 개선장군인양 귀경하여 잔류했던 서울 시민들을 죄인 취급하듯이 대한 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정정화 할머니)
"도망가고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어요. 아무것도 못했죠." (김동일 할머니)
"우리가 학생동맹에 나가서 민요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책 몇권을 돌려 읽는 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고계연 할머니)
"한강다리가 끊어진 거예요. 한강다리가 끊어졌어요." (이정숙 할머니)


개기일식이 일어나 국회의원 선거일이 연기되었던 1948년 5월 9일.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6월 25일. 그 부근을 증언하는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억울해했고, 누군가는 공포에 떨었으며, 누군가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임흥순 버전의 미시사는 교과서 맨 마지막 장마다 실려있던 연표 속에 생략된 수많은 선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보여준다. 단 하나의 '공적' 역사로는 이들의 눈물과 아픔, 상실을 모두 담아낼 수 없음을.  



전시실 앞 벽을 가득 채운 연표 - <시나리오 그래프>
전시 설치 과정 (출처: MMCA 페이스북)


하지만 작가는 할머니들을 그저 스크린 너머의 존재로 머무르게 두지 않는다. 어둑한 상영실을 나오면 김동일 할머니께서 한평생 간직해오신 옷들을 모아놓은 공간이 나타난다. 흰색의 환한 방에는 각양각색의 옷들이 S, S, F, W 계절별로 나눠져 걸려있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행거들 사이를 지나갔다. 옷자락이 내 피부를 스칠 때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손을 꼭 붙잡고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비유하자면 이런 거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주연 배우를 마주친 상황. 정갈하게 쌓인 옷들의 바다, 그 숨 어린 파도에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아 이 영리함이란. 절로 탄식이 나왔다.


유품을 전시한다는 건 할머니에게도, 가족분들에게도, 작가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으리라. 누군가가 사용했던 낚싯대, 뜨개바늘, 부채, 통장, 핸드백, 붓, 브로치, 수많은 숨의 흔적들. 할머니들은 역사를 살았고, 그들의 삶이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남긴 것들은 시대의 증거가 되어 우리들에게 말한다. 잊지말라고, 기억하라고, 이렇게 살아있다고.


전시가 끝나면 필요한 사람들과 유품을 나누려 한다고 했다. 대체 누가 감히 이것들을 가져갈 수 있겠는가 싶으면서도, 오랫동안 세상에 남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3 유령

억울한 죽음을 슬퍼마세요.


그렇지만 전시의 목적은 가려져 있던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달래는 진혼제 같은 느낌이었다. 계단에 앉아 가만히 영상을 보다 문득 이 곳이 무대 같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들이 바쁘게 오갔던 산기슭,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야 했던 배, 임시 정부 거처를 재현한 구조물, 그리고 텅 빈 중앙. 보이지 않는 영혼들을 위한 세트장이 아니었을까. 말하고 보니 전시장 전체가 커다란 제사 의식을 치루기 위한 공간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임흥순의 일곱 가지 키워드 중 일곱 번째인 '유령'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위에서 언급한 ① 역사적 흐름 속에서 희생당한 자들의 영혼과 ② 그 당시 우리를 갈라놓았던 실체 없는 무언가. 전자가 말 그대로의 '유령'이라면 후자는 '유령 같은' 것이다. 왜 우리는 전쟁을 해야만 했는가, 왜 우리는 서로 죽고 죽여야 했는가, 왜 우리는 울고 분노해야 했는가. 그 실체가 정치 이념의 갈등이었든, 국가간 패권 다툼이었든, 우리는 지나고 나서야 안다. 그 시대 속 사람들은 '당장'을 살 뿐이다. 오늘의 우리처럼.



영혼들의 무대가 되는 세트장 (출처: MMCA 페이스북)
 "동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주인 없는 빈 옷들이 걸린 나무 (팜플렛 사진)


그리고 ③ 지금도 우리를 흑과 백으로 맞서게 하는 알 수 없는 유령. 요즘 광화문을 다니며 자주 태극기 집회를 본다. 그들은 왜 태극기를 들게 되었으며, 나는 왜 그들을 보며 눈을 찌푸리게 되었을까. 페이스북 댓글엔 여전히 격렬한 미투 찬반이 오간다. 왜 한쪽은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집단이 되고, 왜 서로를 헐뜯는데 열을 올리게 된 걸까. 이 갈등의 시발점은 어디였을까.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다. 그 당시도, 지금도. 작가는 '우리'로 뭉치자! 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갈라진다. 어쩔 수 없이. 다만, 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지, 왜 누군가는 사랑하는 고향을 잃어야 하는지, 왜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자꾸만 질문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된다. 이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유령들이 떠도는 미래를 막을 수 있을 테니.





현대차 시리즈는 언제나 좋다. 대중과 가까우면서도 충분히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불, 안규철, 김수자에 이어 임흥순까지. 공통점은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사를 몸으로 쓰다>가 흥행했던 것도 그렇고, 대안적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세상이 혼란스럽긴 한가보다. 작년 국내외 비엔날레 주제가 '예술을 위한 예술'과 '사회적 예술'로 나눠졌듯이 전시들도 점점 양분화되는 것 같다. 이상적인 미를 쫓거나 현실을 직시하는 렌즈를 자처하거나. 하지만 개인적으론 '현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이런 작품이 반갑다. 임흥순 버전의 역사 쓰기 방식이 현재를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통했으면 한다.

 




#서울관에 전시가 이거 하나라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영상을 보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그것도 영화관이 아닌, 미술관에서!


##영상에서 옷이 사람의 형상을 한 채 걸려있는 나무의 이미지를 보고 하루종일 나무를 제대로 못 쳐다봤다. 겨울에도 수목원을 갈 만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ㅜㅜ


###3월 21일부터 MMCA 필름&비디오에서 작가의 역대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고 하니 영화관에서 <위로공단>을 놓치신 분들은 가 보시길.


※ 영상 작품이다보니 전시장 내부는 촬영이 불가능하여 중간 중간 외부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출처: MMCA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search/top/?q=%EA%B5%AD%EB%A6%BD%ED%98%84%EB%8C%80%EB%AF%B8%EC%88%A0%EA%B4%80)

아트바바 사이트 (https://www.artbava.com/)





전시정보


제목: <MMCA 현대차 시리즈 임흥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삼청동) 5, 7 전시실

기간: 2017년 11월 1일 ~ 2018년 4월 8일

입장 안내:

- 서울권 관람권 4000원 (24세 이하 무료)

- 월, 화, 목, 금, 일요일 10:00 ~ 18:00

- 수, 토요일: 10:00 ~ 21:00

(18:00 ~ 21:00 야간개장 무료관람)

- 폐장 1시간 전 발권 마감

링크: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170313000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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