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연희,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아침달, 2020)
* 시 전문 계간지 딩아돌하 2021년 여름호에 발표한 글이다.
당신의 콧수염숙녀가 언니, 하고 부를 때
─ 한연희,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아침달, 2020)
최가은
1.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누어지길 좋아한다
인간은 남과 여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모자는 모자와 나로 나누지 않는다
모자를 더 깊게 눌러 쓰지
모자의 각도를 연구함으로써
모자의 둘레를 사랑함으로써
무한 증식하는 존재
─ 「톰보이」 부분
위의 시에는 “흑과 백”, “남과 여”와 같은 세계의 이분법적 논리가 다소 노골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시집 전반으로 일관되게 연장되는 이 직설 화법은 ‘평범함’, ‘자연스러움’, ‘정상성’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 이면에 숨겨진 억압의 위계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대 삶의 한 풍경이 그러한 진실에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맞서는 목소리들로 구성되고 있다면, 이로부터 발생하는 혼란을 다시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며 기존의 논리에 안착하려는 목소리 역시 끊이지 않는다. 이분법적 범주가 아닌, “모자의 각도를”, “모자의 둘레를” 연구하고 사랑하며 “존재”를 무한히 증식하겠다는 한 ‘톰보이’의 선언은 그 팽팽한 목소리들 가운데 들려오는 어딘가 불안정한 음이탈이다. 시집은 “바닥으로 기우는 몸집을 좋아합니다” (「볼링을 칩시다」), “나는 삐뚤어지기 위해 왔지”(「태권도를 배우는 오늘」), “일기 속에 오늘을 틀리게 써넣었다.”(「자주 틀리는 맞춤법」)와 같은 그의 비틀린 고백들로 가득하다.
바닥으로 기우는 몸집을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일이 더는 벌어지지 않아요 나는 코끼리에게 갑니다 뭉툭한 손가락을 놀려요 우뚝 선 핀들을 향해 스트라이크 더블 스트라이크 그게 소임인 양 열심히 넘어지면서 스텝을 밟아요
─ 「볼링을 칩시다」 부분
뻔한 이 세계의 취향과는 달리 본인은 ‘기우는 것’, ‘비뚤어진 것’, ‘틀린 것’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고백하던 화자는 그럼에도 그렇게 함으로써 “재미있는 일이 더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애당초 시집의 관심이 폭력을 지탄하고, 더 옳은 것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일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코끼리의 “뭉툭한 손가락”을 연민하기보다 놀려대고, 그의 앞에서 과시하듯 “우뚝 선 핀들을 향해” 스트라이크를 날리지만, 그때 밟는 스텝은 그저 “열심히 넘어지”는 일에 불과하다고 하니까. 그뿐일까. 자신의 숱한 ‘틀린’ 기록을 스스로는 “현명하다”고 긍정하지만, 그것은 ‘나’와 ‘언니’, ‘나’와 여자아이들, 심지어 ‘나’와 ‘엄마’의 목구멍 밖으로 새어나오는 모든 것을 슈슈, 밍밍, 핑퐁 등 말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원인이 된다. ‘나’의 ‘틀림’으로 인해 언니는 자꾸만 어디론가 사라지고(「자주 틀리는 맞춤법」) 엄마는 사물이 되며(“엄마와 화분은 얼마나 다른가”, 「지갑 두고 나왔다」), 우리 사이의 소통과 연대는 도무지 가능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2.
한연희의 첫 시집 제목(“폭설이었다, 그다음은”)이 암시하는 것은 과거형으로 위치된 어떤 사건과 그 이후를 상상하는 방식이다. 세계의 주변부를 자처했던 이곳 문학의 자리가 실상 타자 간 위계를 설정하는 데 앞장선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가상의 분할을 폭력의 근거로 삼아왔다는 폭로는 문학의 의미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의 시민권에 얽힌 포섭과 배제의 논리를 가시화하고, ‘인간’의 의미는 물론 현실과 작품 사이의 관계마저 재구성한 것은 전적으로 여성을 비롯한 비(非)시민들이 이룩한 결과다.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 ‘사건’으로 정의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한연희의 시집은 그것을 지속하는 일에 집중한다. 하지만 타자로 명명되는 ‘우리’의 삶 역시 서로 다른 차별적 조건과 논리 속에서 형성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않으려면, 투쟁의 언어를 보다 더 정교히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시집은 ‘폭설’을 과거사로 정립하는 일을 거부한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모든 것을 투명하고 매끈하게 뒤덮은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라, 여전히 아무것도 이룬 것 없고, 아무것도 이룰 것이 없을 것만 같은 참혹한 폐허에 가깝다.
창밖은 아직 어둡고
영영 아침이란 것은 없을 것 같고
영영 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을 것 같고
(…)
숙제는 없음 슬픔은 없음 안녕은 없음 봄은 없음
없음이란 계획표에 가까울까 반성문에 가까울까
─ 「겨울방학」 부분
쓰고 읽었던 그간의 자리를 폭설이 내린 후의 소강상태에 비유한 까닭이 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없음’을 강조하는 한연희의 화자들은 “아직” 어두운 창밖과 아침 따위는 영영 찾아들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의 참담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없는 것들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설과 폭설이 뒤덮어 버린 것들은 앞으로의 “계획표”와 지난 시간의 “반성문” 중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을 뒤덮은 설경은 사건의 이전과 이후를 완벽하게 분리하여 사유할 수 없게 만든다.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대학살
(…)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 나면
환각은 사라질 거라고 믿었지만
─ 「유령환각」 부분
폭설 이후에도 ‘대학살’은 아랑곳 않고 이어진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 나면” “사라질 거라고 믿었”던 ‘환각’은 환각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실의 폭력을 환기한다. 비뚤어지겠다는 선언만으론 환각에 개입하고, 환각을 조정하는 일이 불가능한지 모른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톰보이는 돌연 ‘콧수염’을 찾아 나선다. 「핀란드식 콧수염」에서부터 본격 등장하는 이것은 「톰보이」, 「전격 X 작전」, 「콧수염 로맨스」, 「캠페인」 등 시집 전반을 종횡무진하며 시인이 상상하는 ‘그다음’을 그려 나간다.
동네 잡화점에서 잿빛 콧수염을 샀다
검은 털에 비해 잘 어울릴 거라며
주인이 내게 내밀었다
원산지가 핀란드라는 것
물을 뿌려준 뒤 그늘진 곳에서 잘 말려야 윤기가 난다는 것
콧수염을 붙이고
콧수염에 대해 떠들고
콧수염에 대해 자랑하고 다녔다
특별해진 기분이 자라나 거리를 활보했다
세상에 대해 너그러워졌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던 것처럼
─ 「핀란드식 콧수염」 부분
동네 잡화점에서 구매한 콧수염은 핀란드에서 왔다. 내 몸에서 자라나는 것과는 달리 검은 것이 아닌 잿빛의 빛깔을 띠는 이것은 지금껏 내가 인식해왔던 ‘나’의 ‘몸’에 관련된 지식, 즉 출신지(한국), 나이(검은 털), 성별(여성) 등을 모두 뒤엎으며 ‘나’의 외관을 구성한다. 모든 것이 이질적인 그것은 내게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특별해진 기분을 자라나”게 한다. “콧수염에 대해 떠들고/ 콧수염에 대해 자랑하고 다”니는 ‘나’는 점점 세상에 관대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인중을 덮는 무궁무진한 것
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렴
넥타이를 푸는 남자는 근엄한 척 앉아
나를 길들이려 하지
지성은 다리를 쩍 벌려야 하는 거라면서
역사 전문가 흉내는 집어치워
남자의 콧수염을 떼어내
내 코밑에 붙여버리지
─ 「전격 X 작전」 부분
하지만 콧수염은 그저 내 기분을 유쾌하게 해주는 코스튬 쥬얼리 따위가 아니다. “인중을 덮는 무궁무진한” 이것은 ‘나’ 뿐만 아니라 ‘너’의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넥타이’와 ‘쩍 벌린 다리’를 “지성”에 맞먹는 것으로 과시하며 ‘나’를 길들이려던 남자가 내게 제 콧수염을 강탈당하는 모습을 보라. 내가 “남자의 콧수염을 떼어내 내 코밑에 붙여버”릴 때, 옮겨진 콧수염은 백 마디의 훈계와 거들먹거리는 자세보다 훨씬 “중요”하고 “무궁무진한” “역사”를 전달한다. ‘앎’에 결부된 특권, 즉 경청할 만한 ‘앎’의 종류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사소하고 위태로운 토대를 기반으로 하는가를 폭로하는 것, 이로써 지식-권력의 위상을 마음껏 교란하는 내 콧수염이 “역사 전문가 흉내”보다 덜 중요한 ‘앎’일 리 없다.
은근하게 차오르는 통쾌함을 뒤로 하고 콧수염의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본다.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화자에게 자연스레 발생하는 무언가는 아닌 듯하다. 누군가로부터 구매하거나 심지어 빼앗아 와야만 하는 사물이라니 말이다. 그렇다면 화자에게 콧수염이란, 그 자체 어떤 특별한 의도를 내재한 행위일 것이다. 게다가 콧수염을 장착한 화자는 상대인 누군가를 꾸준히 ‘언니’라고 부르거나, “나도 엄마야/ 엄마가 하기 싫은 엄마야”(「지갑 두고 나왔다」), “나는 여자애인데요/ 자랄만큼 다 자랐는데요”(「슈슈」)와 같이 ‘여성’이라는 지정 성별assigned sex을 기반으로 한 자기 지시적 언급을 이어가지 않던가. 이 모든 것이 ‘톰보이’의 의도된 행위라면, 콧수염을 통한 변신은 일종의 성별 위장술 같은 것일까.
잠깐만요, 길바닥에 흘린 나 좀 데리고 올 테니 오 분만 아니 일 분이요
점잖은 척 얌전 빼는 어제의 아가씨는 이제 잊어버려요
우아하게 구부러진 지팡이를 꼭 잡고서
우리 탭댄스를 출까요?
깔깔깔 구두를 멈출 수가 없어요
조끼가 마음에 드나요?
신중하게 다림질한 정장 바지는 또 어때요, 마담
가스등 아래서 나는 들뜨고 있어요
당신의 페티코트와 나의 콧수염
망설임 가득한 오른발과 거침없는 왼손
매일 밤 집 밖을 나서며 수없이 나는 나를 발가벗겼답니다
내 허물이 무궁무궁해지는 것
그러니 챙에 드려진 베일을 벗고 내게 당신을 보여줘봐요
언제나 나는 바이, 당신에게 굿바이
변화무쌍한 알몸으로 배웅해요
(…)
난 바로 당신의 성숙한 콧수염숙녀랍니다
나의 마담, 마드모아젤
─ 「콧수염 로맨스」 부분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아하게 구부러진 지팡이”와 “조끼”, “신중하게 다림질한 정장 바지”에 “콧수염”을 붙이고 ‘마드모아젤’에게 탭댄스를 청하는 화자의 모습은 그와 같은 ‘전환’이나 ‘위장’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톰보이의 콧수염은 젠더 역할이 확고하게 분리된 사회에서 성별의 전환을 수행하는 일도, 사회적으로 유리한 젠더 표지를 가면으로 선택하는 일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콧수염을 장착한 ‘나’는 길바닥에 흘려버리기 쉽고, 그럼에도 “일 분”이면 당장 주워올 수 있는 ‘나’의 무수한 파편 중 하나이다. 화자는 전환이나 위장을 감행할 수 있는 고정된 나가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부정한다. 그러니 수없이 나를 발가벗길 때에도 드러나는 것은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나’가 아니라 “무궁무궁”한 내 허물이며, 허물을 보이는 일은 내게도 “무궁무궁”한 당신을 보여 달라는 정중한 요청에 가깝다.
그런데 ‘나’에게서 발견되는 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무궁무궁”한 허물을 위해 그가 스스로에게 부과된 이원론적 성별 경험을 모조리 무화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가 상대를 부를 때 ‘언니’라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호칭을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자. ‘언니’는 발화와 동시에 대화에 참여하는 자 각각의 성별을 지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관계적인 단어이다. 그런데 한연희의 화자는 호칭에 결부된 특정한 성격은 그대로 둔 채로, 발화자의 위치에 기반이 되는 인식론적 조건을 비튼다. 이처럼 규범으로 인식된 무언가를 비규범적인 방식으로 실행할 때, 콧수염을 단 숙녀가 된 ‘나’는 “언니”를 둘러싼 ‘나’와 ‘언니’ 간의 관계 역시 재조립한다.
물론 시적 주체의 명명과 함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창조되는 것을 그다지 낯선 풍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콧수염을 장착한 채로 ‘언니’를 고집하던 이가, 마침내 “언제나 나는 바이”라고 말한다면, 창조되는 세계의 성격은 조금 더 특별해진다. 시인은 ‘바이’라는 단어에 주석을 달아, 그 의미가 다름 아닌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한 번 더 각인하는데, 이로써 ‘콧수염’은 중층적인 해석을 요하는 시집의 중요한 장치가 된다. 콧수염숙녀는 제 성적 지향과 욕망에 대해 분명하게 발음하며, 스스로가 생각하는 젠더 정체성(“백만 번 죽었다 일어나도 여자이고 싶어요.”, 「소모임」)에도 확고한 한편, 자신의 몸을 끝없이 상대에게 내맡기면서 스스로를 단일하고 고정된 몸으로는 사유하지 않으려 한다. 그가 감행하는 이 특이한 실천은 자신은 ‘콧수염숙녀’이지만 무엇보다 “바로 당신의 콧수염숙녀”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난 바로 당신의 성숙한 콧수염숙녀랍니다
나의 마담, 마드모아젤
─ 「콧수염 로맨스」 부분
버틀러가 ‘젠더’와 ‘섹슈얼리티’로부터 우리 자신의 소유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나아가 “몸으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이상의 것, 우리가 아닌 어떤 것이다.”[1]라고 말할 때, 그가 강조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소유권’ 문제는 ‘몸’의 속성과 매우 긴밀한 연관이 있음이 암시된다. 그의 논의에서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모두가 사회적 과정과 의미, 문화적 규범 등을 거쳐 타인과 관계 맺을 때, 그것이 다름 아닌 몸을 매개로 한다는 사실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 우리의 몸이 이미 특정한 규범과 조건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몸의 자율성이라는 말 자체가 “살아 있는 패러독스”[2]이다. 몸이라는 것에 내재한 근원적인 매개성, 가멸성, 취약성 때문에 내 것이긴 하지만 온전히 내 것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몸’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치적 쟁점을 생성한다. 따라서 몸을 매개로 타인과 관계 맺는 존재 양식으로서의 젠더란, 고정된 무엇으로서 주체의 선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 다른 맥락과 관계 속에서 끝없이 탄생하고 지속되는 지식-과정에 가깝다.
이와 같은 논점은 이른바 ‘젠더 위반’의 행위가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저항의 성격을 갖게 되는 맥락 역시 무수히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따라서 게이, 레즈비언, 바이 섹슈얼임을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나의 삶이 ‘현실-삶’이라고 주장하며 법적인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는 견고한 원리들을 다시 마주하고 다르게 사유하게 만드는 질문이기도 하다[3]. 한연희의 ‘콧수염’과 ‘언니’, “나는 바이”라는 메시지의 연쇄는 후자에 가깝다. 요컨대 그의 목소리는 ‘콧수염숙녀’ 혹은 ‘바이’라는 특정한 정체성에 기반한 법적인 요구라기보다, 고정된 정체성에 의지하지 않고도 정치적 저항을 실천할 방법을 모색하는 자원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퀴어queer한[4] 상상력이다.
내 존재의 양식이 당신에게 속한, 당신과 더불어, 당신을 위한, “당신의” “굿바이”이자, “당신의” “콧수염숙녀”라면 이는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 중심적 사회에서 체현되어왔던 ‘나’의 몸의 감각과 역사뿐만 아니라 ‘당신’의 그것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경험becoming undone[5]으로서 이루어지는 이들 간 관계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 양식”이자 “다른 사람 덕분에 가능한 존재 양식”[6]이라는 젠더, 섹슈얼리티, 몸에 관한 급진적인 사유의 한 사례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억압, 관계의 성격 역시 그러한 사유에 의해 비로소 재배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현실의 우리를 겨냥한 존재론적 질문이기도 하다.
[1]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 허물기』, 문학과지성사, 2015, 47쪽.
[2] 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47쪽.
[3] 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54쪽.
[4] 전혜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 여이연, 2021, 46쪽.
[5] 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10쪽.
[6] 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38쪽.
3.
제니와 손을 잡는다 언덕 끝에는 온실이 있다 온실 속에는 바오밥나무가 있다 본 적 없는 나무를 향해 가는 우리가 있다 땀이 나도 제니를 놓지 않는다 다람쥐 같은 제니, 제니는 꽃님이의 언니, 꽃님이는 열매의 언니, 열매는 잔디의 언니, 잔디는 나의 언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
머리 위 폭력은 시도 때도 없다 벌에게는 쉼이 없다 제니에게는 언니가 없다 나에게는 사랑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뿌리가 되어주자고 약속한다 땀과 소문에 지친 우리는 선인장처럼 가시를 만든다 바오밥나무에는 파인 구멍이 있다 그 속에 우리는 눕는다 옛날에는 여기에 시체를 두고서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우리는 빌지 않는다
꽃은 잔디 틈에서 자라나 이파리를 벌린다 제니는 열매를 맺고 잔디는 마구 영역을 넓혀간다 돔의 천장을 깨부수고야 만다 우린 실수로 태어난 게 아니라서 뿌리를 가질 수 있다 그런 의지가 어깨 팔다리를 갖추고 가지를 키운다 손과 손이 불쑥 튀어나온다 식물원 가득한 언니들이 마주 잡는다
─ 「식물원」 부분
폭설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머리 위 폭력은 시도 때도 없”고, 여전히 “눈을 뜨면/ 아침은 스릴러에 가까운 장르”이며, 어떤 날엔 “밀실에 갇힌 건 누구였”는지, “어제가 언제였”(「양산 굿즈」)는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의 세목이 쉽사리 기억나지 않기도 한다. 콧수염숙녀의 우아한 탭댄스와는 달리, 사회가 인정하는 이원론적 ‘젠더 규범’을 이탈하는 행위는 여전히 현실의 즉각적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절망스러운 사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제니에게는 언니가” “나에게는 사랑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나날들에도 끝내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엇이든 “마주 잡는” 콧수염 언니들의 연쇄일 것이다.
시시콜콜잔뜩콧수염을 내밀고 겨울로 나아갑시다
공중으로 퐁퐁 터지는 비눗방울 콧수염
자유 연상 놀이에 빠진 알파파 콧수염
무지개 콧수염과 콧수염 고양이와 모두모두콧수염
(…)
겁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콧수염이 달아나도 놀라지 마세요 새로운 종이 태어나는 시기입니다
─ 「캠페인」 부분
시시콜콜 다종다양한 콧수염 언니들이 가슴을 내밀고 ‘없음’의 겨울로 다시 나아간다. “콧수염이 난 인간 때문에 세계는 곤두박질쳤지만/ 이제는 콧수염이 가득한 세계에 평화가 깃들”(「카이저에 대한 짧은 소견」) 것이라 믿으며. 콧수염을 달고, 콧수염 언니들의 손을 잡고, 서로 다른 콧수염 ‘우리’는 폭설을 지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