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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은 Jun 25. 2022

도착하지 않는 약속의 시간, 서울

- 김이강론

* 서정시학 2022 여름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김이강 시인이 같은 지면에 게재한 신작 시 5편에 대한 소개 겸 첫 리뷰. 


도착하지 않는 약속의 시간, 서울

― 김이강론     

최가은                    



나는 걷기로 했어

그게 무슨 뜻인지는 우리도 모르지만     

바다가 보이는 주유소

그런 곳으로 가는 길     


― 「바다가 보이는 주유소」 중에서       

        

    김이강의 시가 쌓아올린 지난 이미지들을 한데 모아 보면, 그것은 ‘걷기’를 행하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겹친다. 그 모습에는 꽤나 유별난 데가 있다. 오후의 산책자나 대낮 관광객의 걷기와는 어딘가 다르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곧 김이강의 걷기가 그런 걷기들보다 더 나은, 혹은 진정한 걷기를 보여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걷는 일과 흔히 동일시되는 산책이나 관광과는 구별되는 몇 가지 요소들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모아 김이강의 걷기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의 걷기에서는 산책이나 관광에서 중요한 사색, 혹은 사물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감응의 단계가 우선시되지 않는다. 그의 걷기는 차라리 그런 걷기의 의례들을 무시함으로써만 지속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서두르는 기색은 없으나, 한껏 여유롭지도 못한 속도, 무언가로부터 떠밀리며 내딛는 그의 긴장된 보폭은 와중에도 이상한 나른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니까 김이강의 걷기는 특정한 목적지를 향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 뿐더러,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를 온전한 목적으로 삼는 걷기도 아닌 것이다. 

    그의 걷기에는 언제나, 어디선가, 어떤 모습으로든 누군가가 끼어드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그의 걸음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늘 흥미롭다. 누군가의 개입은 그의 이상한 보폭과 속도가 제 자리를 찾은 듯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다. 그것은 김이강의 걸음이 눈앞의 사물 혹은 제 자신과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곁에 함께하는 누군가와의 보조 맞추기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함께 걷는 이의 눈을 다정히 마주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를 대신해 그의 주변을 살핀다. 옆 사람과의 사이에 아슬아슬한 한 뼘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을 지켜내는 데 열중하는 그의 걷기는, 걷기가 곧 누군가와의 밀도 높은 대화의 과정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해방촌 언덕에서 내려다보았다

작은 집들 집들     

오후 네시

언덕은 한가하고 구불거리고     

이 마을엔 고양이가 많고

고양이에게 오후의 빛이 있다

그들 자신의 눈빛이 비쳐드는 순간     

서점에서 놓쳐버린 잡지를 사려고 했지만

주인은 팔지 않는다고 한다

오후 네 시가 되기까지

서점 창가에 앉아

순종적으로 그것을

읽는다

[…]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구불구불한 길들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

깨지기 직전의

오후 네시 직전     

― 「해방촌 언덕」 부분     



    이번 소시집에 소개된 다섯 편의 신작시에서도 김이강의 화자는 길 위에 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더는 걷지 않고 어딘가에 줄곧 멈춰 서 있다. 여전히 ‘나’의 몸짓과 자세는 예의 그 특별한 걷기를 연상하게 하지만, ‘나’가 서 있는 곳이 그때 그 걷기를 멈춘 지점인지는 확실치 않다. 걷던 도중 예상치 못한 무언가에 의해 멈춰 서서, 혹은 잠시의 휴식을 갖기 위해 그가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낸 것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길의 한가운데로 불쑥 솟아 있던 이 화자는, 애초부터 우두커니 그리고 집요하게 서 있음으로써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선 특정한 장소를 발음한다. 언뜻 무작위로 선택된 것처럼 보이는 이들 곳곳은 ‘해방촌’, ‘정동’, ‘창덕궁’, 또는 ‘장면 가옥’이 있는 ‘명륜동’, 즉 서울이다. 서울의 어딘가에 멈춰 선 그는, 서울의 “작은 집들 집들”을, “한가하고 구불거리”는 언덕과 길을, 그 길의 곡선을 메우는 많은 고양이들을, 고양이의 눈에 비치는 오후의 빛을 마주한다.  

    그에 따르면, 이 모든 정황은 무언가가 도착하기 “직전”의 상태이다. ‘직전’은 곧바로 뒤이어질 사건을 예비하기 위해 마련된 순간이라는 뜻으로, 바로 그 다음의 사건을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오로지 그 직전의 순간만을 버티고 선 화자로 인해 ‘해방촌 언덕’을 비롯한 이들 서울의 곳곳에서 직전의 본 목적은 전도된다. 이제 독자에게 ‘직전’의 순간은 직전 이후가 아닌, 직전 자체를 사건으로 대면해야 할 ‘중지’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정체는 잠깐의 휴식, 혹은 유예의 시간 같은 것이 아니다. 전도된 직전은 “깨지기 직전의/ 오후 네시 직전”, 즉 깨지기 직전의 직전으로, 이 ‘깨짐’의 위협 앞에서 화자는 직전을 단순히 그만둘 수도 없다. ‘직전’을 멈출 수 없는 화자는 순순히 ‘잡지를 읽는 것’을 한다. 서점의 주인이 팔지 않는다고 선언했기에 이미 “놓쳐버린 잡지”는 내 손에 있을 리 없는데도 ‘나’는 “순종적으로 그것을/ 읽는다”. 그는 이렇게 ‘직전’이라는 직전의 질서에 순종함으로써 ‘멈춤’의 의미를 헤아려본다. 이 순종의 시간 속에서 발음되는 서울의 면면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폐허가 출현하는 것은 이 같은 근대화의 시간,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일방통행로가 무너지는 신호다. 한편에서는 효용을 상실한 과거의 폐기물들이 제때 치워지지 못한 채 쌓여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자꾸 눈앞의 풍경을 현재의 일부가 아니라 여기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잔해 또는 이미 도래했어야 하는 미래의 빈자리로 인식한다. 물리적으로 부서진 것이기 이전에 시간적으로 파손된 것으로서, 폐허는 종종 착시를 부른다. 때로는 아주 육중하고 구체적인 존재라도 무언가 이미 무너진 것 또는 벌써 지나가버린 것의 잔상처럼 보임으로써 폐허가 될 수 있다. [윤원화, 『1002번째 밤 :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워크룸프레스, 2016, 41쪽]     



    ‘서울’과 ‘미술’의 관계에 주목해 온 윤원화는 위의 책에서 2000년대 후반 서울 곳곳을 점령한 폐허들과 그 폐허 속 서울의 미술을 이야기한다. 서울의 폐허는 근대화 이후, 공격적인 미래주의의 약속들이 추동했던 ‘서울의 시간’을 반추한다. 그런데 ‘서울의 시간’이라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곳곳의 폐허는 약속된 미래가 결코 제때 도착하지 않는 곳, 그럼에도 끊임없이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미래를 소환하려는 몸부림(42) 역시 사라지지 않는 곳, 즉 ‘서울’이라는 시공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윤원화가 말하는 00년대 이후의 서울은 좀처럼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 불확실성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말하자면 서울은, 특히 적극적인 개발과 보존의 프로젝트 양쪽에서 모두 밀려난 서울 구도심의 폐허는, 미래를 볼모로 현재를 장악했던 온갖 약속의 말들이 온전히 떠나가지도, 제대로 도착하지도 못하는 어떤 서사의 구멍을 증언한다. 이에 따르면 폐허란 단순히 낡고 쇠락한 것이거나, 혹은 감상주의적 미학의 소재로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폐허를 “낯설고 기괴해진 현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40)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폐허라는 흉터를 통해 서울이 무한 재생하는 일방통행로적 서사를 중지하고 그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우선 들어설 수 있다.      



네가, 가니

내가, 가니     

그런 것을 정할 줄 몰라

오늘은 

내가 버스를 타려고 한다     

오래 앉아서

달리려고 한다     

[…]     

무언갈 말하려는

찰나의 너를 끌어안고     

내가 갈게

내가 다시 올게     

그런 얘길 하려는 

찰나에     

우리 이야기는 잠깐

밑줄 그어진 채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고     

― 「우리 이야기는 잠깐」 부분     



    ‘해방촌’과 ‘정동’, ‘명륜동’과 ‘창덕궁’ 등의 오래된 장소명은 제 자신이 서울의 과거가 될지 미래가 될지 도무지 결정된 것은 없지만, 결정되지 않음으로써 보란 듯이 존재하는 어떤 구멍을 지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불확실한 구멍, 즉 ‘서울’에 막 들어선 시인은 무엇을 하는가. 삶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또 하나의 추상화된 약속을 근거로 폐허의 구멍을 매끄럽게 메우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몫인 걸까. 속도주의와 분별되지 않는 미래주의라는 서사가 익숙한 만큼이나, 그것을 중지시키고 다른 서사를 대면하게 하는 ‘지금-여기’를 곧 예술의 자리로 대체하며, 곧바로 다른 종류의 약속을 도착하게 만드는 것 역시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이다. 도착하지 않는 무책임한 약속의 언어를 폭로하는 폐허는 ‘지금-여기’를 점령하는 예술의 약속으로 너무도 쉽게 ‘다른’ 미래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김이강의 화자가 서 있는 여기 ‘직전’의 서울은 오지 않을 약속을 기다리는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에게 ‘다른 약속’을 선언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없는 약속이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가, 가니/ 내가, 가니”가 결정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서 있는 여기가, 추상화된 지금-여기가 아니라, 바로 그 00년대를 온몸으로 통과해 온 2020년대 서울의 구도심-폐허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때 오지도, 제때 가버리지도 못함으로써 이상하게 구겨진 그 시간의 의미를 헤아리려 하지 않고, 그 사이에 “오래 앉아서” 어떤 얘기를 하려는 “찰나”에, 그 시작되려는 이야기가 엎드린 그 “잠깐”에 “밑줄”을 그으며 그것이 마치 우리의 이야기인 척 한다.     



테라스는 춥고 흐리고 바람이 분다

테라스는 늘 춥고 흐리고 바람이 부는 때에 있다     

커피를 다 마신 후에도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떠나는 게 싫어서 계속 그런 때에 있는 테라스에     

사람들은 앉지 않는다

유리창 내부에서 부드러워 보인다

사람들이 소곤소곤 그렇게 있고

시간이 일 초 이 초 삼 분 오 분

흐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무더기로 늘어나는 것 같다

와글와글 그런 입자들이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테라스가 있다     

철제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처럼

등받이 의자들이 모두 테이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들 모두 머리를 맞대고

중요한 일에 대해

어떤 끔찍한 사건에 대해

침울하게 논의 중인 것처럼

그렇게 있는 것 같다     

내가 수상한 것 같다

폐허 같은 테라스에 앉아서

책을 읽고 타이프를 하는 게

머릴 맞대는 게

그러는 게

그럴 수 있는 게

그럴 지도 모르는 게     

― 「정동, 테라스, 사건들」 전문     



    ‘정동’의 ‘테라스’에 있는 화자는 자신이 서 있는 이곳 테라스가 “춥고 흐리고 바람이 분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속에 계속 서 있음으로써 그의 문장은 수정되는데, “테라스는 늘 춥고 흐리고 바람이 부는 때에 있다”가 그 결과다. 일견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문장은 테라스의 현 상태를 설명하는 것에서, 그런 테라스가 “늘” ‘있다’는 사실로 강조점을 이동함으로써, 테라스의 ‘끈질긴 있음’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재서술은 ‘정동, 테라스’를 ‘직전’의 상태로, 즉 현재의 ‘사건들’로 온전히 재배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테라스의 있음은 사람들이 “커피를 다 마신 후에도”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리하여 결국엔 다들 이제는 “앉지 않는” 때에도 제 목적을 상실했다는 사실마저 상실한 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테라스의 있음은 “물리적으로 부서진 것이기 이전에 시간적으로 파손된 것” 즉, 폐허로서 무언가에 대한 착시와 잔상으로 남아 제 모습을 끈질기게 드러낸다. 그것을 목격해버린 화자는 아무래도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정체를 수상히 여기면서도, 계속해서 테라스의 있음과 나란히 버티고 설 수밖에 없다.     



‘장면 가옥’이라고 적힌 현판 앞에서 망설였어. 버스를 기다리려던 것인지 가옥에 들어가 보려던 것인지.     

이 이름을 오래 전에 듣곤 했지.

장면 선생이 그때··· 

···만 아니었어도···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데 자꾸만 얘기하던 할아버지 선생님의 표정에

까닭 모를 회한 같은 게 서려 있었지.     

장면 선생.

이 이름을 누가 기억할지.

당신의 표정을 그 누가 기억할지.     

[…]     

테라스를 응시하는 사람의

조용한 귓바퀴를 구경하느라

바깥이 한참 이어진다     

― 「장면들」 부분    


      

    이 착시는 무언가의 ‘잔상’이라는 불확실한 의구심을 끝까지 쫓게 하면서, 화자를 ‘장면 선생’과 ‘장면들’을 뒤섞게 한 원인, ‘장면 가옥’ 앞까지 데려다놓는다. 그는 장면 선생이 없는 장면 가옥 앞 버스 정류장에 또 다시 서서, 장면 선생을 발음했던 “할아버지 선생님의 표정”이 남긴 잔상을 본다. ‘장면’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근대화의 온갖 바람이 할아버지 선생님의 표정을 훑고, “장면 선생이 그때… /…만 아니었어도…”라는 기억의 바람이 끝내 불러오지 못한 “…” 속에서 ‘나’는 서울이라는 땅이 무엇에 빚지고 무엇을 밟고 서 있는지를 본다. 그러나 화자는 여전히 무언가를 함부로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다시, “폐허 같은 테라스에 앉아서”, 그런 “테라스를 응시하는 사람의/ 조용한 귓바퀴를 구경”하며 약속된 시간 ‘바깥’을 한참 이어가는 것을 제 몫으로 여길 뿐이다.           



그 사람이 힘들다고 했는데

나는 저 문턱을 넘는 일이 재미있을 거라고 말했다     

창덕궁 입장권은 창경궁보다 비싸고

카페가 있다

힘든 그를 위해 우린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다

카페에 앉아 방금 지나온 창경궁 생각을 했다     

[…]     

온 힘을 다해 창덕궁에 입장했는데

이젠 어떡할지     

문턱을 넘으면 다시 창경궁이다

돌아가는 길에 식물원 앞 분수대에 또 가보기로 했다     

그 사람이 힘들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며     

의자로부터 일어선다     

― 「창덕궁에 갔다」 부분     



    그리고 그의 ‘직전’엔 여전히 누군가가 들어선다. ‘직전’이 직전 이후로 재생되기 직전, 바로 그 사람이 힘들어 한다는 이유로 김이강의 직전은 다시금 직전의 상태로 붙들린다. 그의 시가 다시 그렇게 “의자로부터 일어선” 직전의 순간 속에 이미 앉아버린 우리는 그 앞에 펼쳐질 또 다른 폐허를 기다려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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