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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류 Sep 18. 2023

치료는 내가 필요로 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저는 대학에 가고 싶어서 우울증 치료를 결심했습니다

 무엇이든 내가 필요로 해야만 효과가 좋다. 공부도, 운동도, 그리고 치료도.


“엄마, 나 정신과 가고 싶어요.”


너는 무슨 그런 말을 밥 먹는 와중에 하니. 이런 말이 절로 나와도 될 정도로 내 말은 매우 뜬금없는 타이밍에 튀어나왔다. 엄마와 단 둘이 저녁을 먹는 와중에.


“왜?”


우리 집은 정신병원이라는 존재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이라, 사실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미리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일단 들어나 보자’라는 생각이 분명할 엄마의 짧은 말은 나에게 긍정의 신호탄으로 다가왔고, 긍정을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장황한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내가 좀 우울한 것 같아서. 거 나도 이제 곧 성적이 매우 중요한 고2잖아요? 우울한 사람은 지능이 떨어진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내 성적이 좀 별로인 것 같아서. 요즘 열심히 해도 공부가 안 되는데 그래도 성적이 돼야 대학에 가든 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치료를 좀 받아보고 싶네?”


평소에 말 좀 한다는 나였는데도 이번 설득은 완전 꽝이었다. ‘~같아서’를 남발하며 밥알인지 침인지 모를 것들을 열심히 뱉어내며 속으로는 눈물을 삼켰다.


 결국 내 말의 요점은 이거였다.

‘우울증인 것 같으니 치료를 받게 해 달라.’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숟가락을 놀리던 엄마도 성적이라는 강수를 두자 씹던 음식도 잊은 채로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 반응에 희망 한 가닥이 잡힌 내가 신이 나 더욱 횡설수설하게 된 것은 덤이다. 최근 내 처참한 성적표에 관해 언쟁이 오갔었는데, 지금만은 그 일이 있던 것에 감사해야만 했다. 엄마, 제발 나의 처참한 성적표를 떠올려줘요...!


“... 그래, 그럼 엄마가 한 번 알아봐 줄게.”


짧은 고민 후 엄마가 내놓은 답은 내가 조용히 주먹을 쥐게 만들었다. 만세! 이제 약 먹고 멀쩡해지는 일만 남았다!

이것이 정신과와 정신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돌릴 수 있던 마지막 행복회로였다.




“꽤 심각하네요.”

“네?”

“보통 이 정도면 가끔 청년치매로 착각하고 병원에 찾아오는 분들도 계세요.”


내 행복회로가 제대로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저 내 성적이 안 나오는 이유가 우울증 때문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정신과에 방문한 나에게 전해진 것은 내 지능이 겨우 돌고래와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는, 별로 알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정보였다.

‘이러니 성적이 그 모양이지.’

그러나 이 진단을 듣고 나는 분명 안심했다. 내 처참한 성적에 대한 정당한 명분이 생긴 셈이니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이큐가 80밖에 안 된다더니, 진짜인가 봐? 노력을 하면 되잖아!’

안타깝게도, 내 상황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에너지 음료를 2~3캔씩 비워가며 눈을 부릅떴고, 야자실과 학원에 틀어박혀 일주일에 한 권씩 문제집을 풀었지만 점수는 한 자릿수가 나올 만큼 처참했다. 부작용으로 벌벌 떨리는 손이 무서워 눈물을 훔쳐낸 날들을 모르는 이들이 노력을 운운하는 것이 억울할 뿐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표면적으로 잠이 많고 성적이 부진한 나는 누가 보아도 ‘노력하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일반 병원에서 ‘3일 뒤에 봅시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익숙했던 나에게 주어진 것은 14개의 봉투에 개별포장된 약과 ‘그럼 2주 뒤에 봅시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었다.

약은 여타 약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신과라 무언가 다를 것이라 겁먹은 감정이 어딜 갈지 몰라 우왕좌왕할 정도로. 선생님들은 다른 병원들보다도 친절했고 약은 쓴 맛이 났다. 그러나 달랐던 것은 내 마음가짐이었다. ‘노력하면 되는’ 일반인을 향한 내 간절함이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약만 있으면 이제 나도 멀쩡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

지금 보면 약을 향한 기대치가 너무 높지 않나 싶지만, 우울증 치료(정확히는 그로 인한 성적 향상)가 제법 간절했던 돌고래는 어쩔 수 없었다.

간절함은 외적으로도 효과가 있었다. 어느 정도로 효과가 있었냐면...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3일 치의 약을 받아오면 2.5일 치를 남기던 내게 약봉지가 한두 개 정도만 남는 것은 기적이었다. 자기 스스로 나아지는 법을 몰랐던 돌고래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신봉하다시피 했고, 상담 치료까지 병행한 결과는 제법 빠르게 나타났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늘 삶에 끌려다니다시피 했던 나는 이른 나이부터 우울증을 앓아왔다. 그러나 치료의 계기는 쉽게 찾아와 주지 않았다. 우울한 마음은 몸을 그 순간에 머무르게 했고, 좋든 싫든 나아갈 의지마저 잊은 채로 최악의 순간을 삶에 이끌어냈던 것이다.

대학 입시에 성공한 지금도 여전히 약과 싸우는 나의 우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도 한 번의 필요가 간절함을 이끌어낸다는 공식을 알아낸 지금은 괜찮다. 나는 또 내가 행복할 필요성을 사소한 구석에서 찾아낼 것이고, 간절함은 원동력이 되어 또 나를 한 발짝 나아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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