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도 아픈 티를 내는 사람은 아니다. 당장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을 하고도 ‘괜찮다’라며 하하 웃는 내 모습을 보고 ‘무섭다’ 혹은 ‘안쓰럽다’는 감상을 남기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사람은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게 된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이를 대접하라'라는 말에 큰 감명을 받았던 어린 날의 나는 맑은 날 길 위에 나온 지렁이에게도 예외 없이 친절했다. 최대한 미소를 띠고 행동하는 것은 나 자신 또한 즐겁게 만들었다. 가끔 호의를 권리로 아는 작자들에게 공격받아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으나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나를 좋아해 준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결국은 그 습관이 나에게 독이 되었다. 과한 친절이 습관이 된 나머지 죽음의 공포에게도 똑같이 친절했다는 것이다.
친절이 습관이 된 몸뚱이는 내쳐야 할 것에도 예외 없이 친절했다. 그러다가 어김없이 상처를 받을 뿐이다. 죽음의 공포 앞이라고 다른 건 없었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보며 최대한 잠기운이 나의 눈을 덮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이러다 죽겠구나.’
처음 맛본 죽음을 향한 극심한 두려움은 내 본성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결국 모든 걸 내려놓고 웃었다. 모두에게 그랬던 것처럼 진심이 담긴 말을 농담으로 포장한 채 정승처럼 허허 웃었다.
“와, 이러다 죽겠는데?”
들어줄 이 하나 없어 답이 돌아올 리 없는 벽에게 말을 걸었다. 푸른 계열의 벽지를 입은 벽은 끝내 흐르는 눈물 한 방울에도 단단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죽음의 공포는 나와 매우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켜 둔 것을 잊으면 안 되는 촛불이 되길 원하는지 공포감은 깊은 밤이면 내 심장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죽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날들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병원에 올 날은 금세 다가왔다.
“이번에는 어떻게 지냈어요?”
의사 선생님의 질문은 변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답이 달라질 뿐이었다.
“... 그런 일이 있었어요.”
최대한 단조롭게, 그리고 명료하게. 횡설수설하지 않기를 빌며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그날의 나로부터 말을 전했다. 어차피 또 우울증이 기승이겠거니 싶었다. 이런 일들은 전부 우울증이 문제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이거 좀 문제인 것 아냐?’라는 생각으로 호들갑을 떨면 대개 ‘그렇다면 약 용량을 조금 바꿔볼게요'라는 말과 의사 선생님의 은은한 미소가 나를 반겨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건 공황의 증상이에요.”
“으잉?”
어째서인지 나는 무언가를 진단받을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아무튼 이번에도 바보 같은 소리를 내버렸다. 어렴풋이 병명을 예측하고 정답을 확인받았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예상치 못했다. 아니, 그전에 나에게 ‘공황'이라는 단어는 연예인에게서나 들어본 단어였다.
‘그런 걸 나 같은 게 경험해도 되나?’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연예인들에게서나 들어보았다는 생소한 단어는 쉽게 본 것과 다르게 너무나 익숙한 듯 내 삶을 망가뜨렸다. 숨이 가빠오고 심장은 빨리 뛰었다. 고양감과는 달랐다. 아니, 감정이 고양되어도 발작은 찾아왔다. 긴장 상태가 되면 어김없이 발작이 찾아와서, 심장이 뛰는 것조차 무서워질 정도였다.
생소하지 않은 병명을 딸에게서 접한 가족은 나의 병을 생소한 것 다루듯 거칠게 다뤘다. 모든 걸 핑계로 치부하던 나의 부모님은 결국 나의 발작을 직접 목도했고, 그제야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제나 최악만이 원하는 걸 가져다주는 기분은 매우 참담했다. 인생이 주는 병은 매우 쓴 데 비해 약은 그저 텁텁할 뿐이다.
장애라고 불릴 수준의 불안이 생겼다. 완벽주의와 결을 같이 하는 강박이 생겼다.
“어쩌지, 어쩌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또 그러한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벌벌 떨렸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워지고, 또 언제 어디서 발작을 일으킬까 무서워 외출도 꺼리게 되었다.
새 인연을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오히려 새 인연이 강제되면 그 싹을 자르고 싶어 기존의 인연도 끊으려 했다.
이번에도 완전히, 빠르게 치료할 방법은 없었다. 앞으로 걸어 나가려 해도 저려오는 팔다리가 나를 자꾸 주저앉혔다. 몸은 차가운데 속이 뜨거워서 식은땀이 온몸을 점령하는 탓에 한겨울에도 짧은 소매만을 고집했다.
공황이 시작된 후로 체중도 많이 늘었다. 흉통이 너무 심해 먹는 것을 힘들어하면서도 심장이 빨리 뛰게 되는 것을 피하자 자연히 활동량이 줄어든 탓이다. 활동량이 줄어들자 쉽게 우울해졌고, 우울한 마음은 공황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로 나의 몸과 마음을 해치게 만들었다.
“진짜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평생을 살면서 본심을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적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이 글도 약한 공황이 온 상태에서 쓰는 글이다. 당장이라도 나를 놓아버릴 것만 같은 감각이 쇄도하지만 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지금이다. 아마 이 글은 매우 혼란스럽고 두서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퇴고는 하지 않았다. 나의 감정과 간절함을 최대한 보존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