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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류 Nov 03. 2023

무례한 딸이 되어버렸다

가장 소중한 사람인데 표현이 잘 안 돼 ​

나는 예의 바른 사람이다.




나는 어딜 가나 ‘예의 없다’ 같은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예의 바른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들어왔고 나 자신도 그렇게 자부하고 살았다. 분명 부모님께도 좋은 자식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 정도면 다른 집에 비해 훌륭한 자식이다’라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좋은 딸, 예쁜 딸, 입안의 혀 까지는 되어드리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효녀.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을 계기로 깨달아버렸다.

‘아, 나는 불효녀구나.’

심지어 내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무례한 사람’. 그것이 나였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성장했다. 어릴 적의 일들이 많이 부끄럽고, 또래에 비해 생각이 많이 성숙한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더더욱 그런 점을 의식하고 살았다. 지금도 다른 사람의 동에 내가 절로 부끄러울 때가 많았고, 그렇기에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건 전부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치기 어리고, 생각이 얕으며, 겸손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주제에 누군가는 가르치려 하고, 누군가를 부끄러워했으며,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고 괜히 점잖은 척했다. 당장 부모님께 그린 듯한 딸도 되어드리지 못하면서, 그린 듯한 ‘군자’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데,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과 행동이 주위에 어떻게 비쳤을지. 뒤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 다녔을지 무서워지기도 한다.


나와 우리 엄마는 서로 대화를 잘 나누는 편이고, 함께 산책을 하거나 카페에 가는 등 같이 시간을 보내는 비중이 많은 편이다. 물론 마음이 잘 맞을 때더 많은 건 말할 것도 없다. 엄마는 자신이 살아온 어린 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만큼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아 하셨다. ‘친구 같은 엄마’. 그것이 엄마의 목표였으며 결국엔 이루어진 소원이었다. 그렇게 나에게 엄마란 어머니인 동시에 친구고, 멘토이며, 선생님이고 장녀인 나에게 하나뿐인 언니였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엄마가 나와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님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엄마는 나와의 장벽을 없애려 노력했지만, 나는 그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말로 엄마를 할퀴어 가며 선마저 넘었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요즘 엄마 왜 이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며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동물도, 식물도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바뀌는데, 사람이라고 바뀌지 않을까. 어리석게도 나는 엄마가 시간을 초월한 다른 것이라고 속단하며 일말의 변화도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다.

변해가는 엄마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끄럽게 여기며 왜 그러냐고 화를 내 버렸다.

엄마는 이제 그런 말들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부러 강한 척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런 말’이라고 지칭하는 것부터 엄마의 마음속에는 그 말이 깊이 박혀 들었고, 이미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엄마는 친구고, 멘토이고 선생님이기 이전에 엄마이기 때문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다가가기 쉽다고 해도 쉬운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건데, 밖에서 번듯한 사람이면 무엇 하나, 나는 엄마 앞에서는 한없이 부끄럽고 무례한 딸일 뿐이다.


내가 우리 엄마를 먼저 감싸주고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엄마를 이해해 줄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은 나를 먼저 이해하려 노력해 준 것은 엄마였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당장 약해진 우리 엄마를 끌어안아주지도 못하면서 무슨 알지도 못하는 노인의 권리와 복지에 관심을 가졌는지, 너무나 수치스럽다.  

당장 우리 엄마부터가 얼마 안 가 노년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우리 엄마를 끌어안아주지 못한다면,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을 그릇조차도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엄마도 사람인데,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데 나는 엄마가 언제나 나의 안식처로만 있어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면 뭐 하나. 이미 무너진 둑 다시 세우려 마음먹어보아도 이미 떠나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론으로는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을까.

나는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엄마가 찢어지게 아픈 마음을 드러내야만 겨우 위험신호를 알아채는 나는, 대체 언제쯤이면 엄마를 보듬어주고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걸까?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지만, 나는 엄마의 말을 잘 들어주었을까? 나는 엄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맞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에 대한 답은 ‘아니요’다. 나는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엄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고, 누구보다 엄마와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서로가 기대어 버티고 선다고 ‘사람 인(人)’자를 쓴다는데, 우리는 사람 인을 이룰 수 없는 상태였다.




우리에게는 더욱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늘 엄마가 내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끊어버리고 엄마 할 말만 한다고 투정을 부렸는데, 사실 엄마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막고 있었던 것은 나였나 보다. 이번에는 제대로 엄마의 말을 들어주고 싶다. 엄마가 나와의 대화 시간을 치유의 시간으로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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