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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류 Nov 24. 2023

조용한 손절

이런 사람은 싫어요 ​

나는 이번주에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조용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그러나 나에게는 질질 끌던 일이었다. 원래도 그리 편하지 않던 관계였는데, 모종의 일로 나의 황증세가 악화되는 것을 느꼈고, 결국 메신저 앱에 들어가는 것마저 무서워하는 나를 본 의사 선생님의 조언이었다.


“무조건 차단하세요.”


별의별 핑계를 대 보아도 다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후에 일어날 일들이 두려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고 말했고, 선생님은 ‘좋게 끝나는 인간관계는 없다’라고 단언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나를 괴롭게 하던 이들을 잘라내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꼭 맞춘 듯 취향부터 가치관까지 100%가 일치하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안다. 유전자를 받은 부모님과도, 피를 나눈 형제자매와도 맞지 않는 것을 생판 남이 맞을 리가 있나. 그러나 같이 있을 때 편안한 사람과 불편한 사람은 나누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했을 때 좋은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친해진 다음에는 기본적인 예의도 말아먹는 인간들이 있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내가 이번에 손절한 이들은 그런 편에 속했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꽤 불편한 기간을 보내야만 했다.

엄마는 나의 인간관계가 계속 좁아지는 것을 걱정하며 나의 사회적 관계를 위해 그들을 남겨두라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사회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판단했다. 결국 남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의 응어리뿐인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매 순간 득실을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내게 해가 되는 관계를 지금까지 질질 끌어 왔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꽤 깐깐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의 말을 빌리자면 무던하다고 한다. 다른 이들이 맞춰주기 힘든 성향임을 알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맞추어 준 결과일까. 흔히들 ‘자아가 없다’라고 말하고는 하지만,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해 나는 제법 장점이라 여겨왔다. 나 자신이 흐려지지만 않으면 제법 성숙한 행위가 되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내게 불호의 기준은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다른 이에게 맞춰주는 쪽이기에 특별히 스트레스만 받지 않으면 부러 관계를 끊어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깨달았다. 내 불호의 기준을 한 번쯤은 정리해 두고 이것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야 더욱 성숙한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구나.

아래는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의 부류이다.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이들과 가까운 관계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이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싫다.


자존감은 높을수록 좋다. 자신감도 적당하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타인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이 바뀌는 것이 쉽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타인은 쉽게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쉽게 타인을 가르치고, 바꾸려는 하는 오류를 범한다. 자신에게는 자신의 세계 하나밖에 없기 때문일까? 나는 겸손을 미덕이라 보기 때문에 늘 조심하려 애쓰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각도 하지 못하고 다른 이를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대가 차이나는 어른이 아이에게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막말을 하는 사람이 싫다.


‘사이다’, ‘할 말은 함’을 빙자하여 남에게 못 할 말을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나는 친할수록 예의를 차려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까운 사람으로 대해 주는 것에 내가 그럴 만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예우를 갖추는 것이다. 이는 나의 가치관에도 가깝고, 무엇보다 양보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상에는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속마음을 빙자한 막말을 늘어놓는 자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과는 절대 가까이할 수 없다.


이기려 드는 사람이 싫다.


이기려 드는 순간, 가르치려 드는 순간 그것은 대화가 아니다. 그저 개싸움일 뿐이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내가 타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늘 명심하는 점이기도 하다. 지적과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감사히 받아야 할 문제고, 상대가 나를 소중히 여겨준다는 신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을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다. 또 걱정이라는 감정을 껍데기로 개싸움을 향한 발화를 들이미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전부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니 이 점을 유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할 수 없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내로남불’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싫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엄한 사람은 쥐 잡듯 잡으면서 자신에게는 유한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이 싫다. 불륜은 누가 해도 불륜일 뿐이다. 같은 행동을 하면서 자신은 아닐 것이라 굳게 믿는 행동. 그것이 똥 묻은 개가 겨 묻는 개 나무라는 꼴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자신의 사람을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타인에게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은 그 누구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호감을 살 만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행위라면 단언컨대 그 누구의 호감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저 기본적인 예의만 지키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왜 이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이들이 많을까. 사람은 언젠가 모든 것이 드러나고 타인에게 한 것을 그대로 돌려받는 때가 온다. 나는 그것을 명심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걸 명심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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