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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류 Dec 01. 2023

수단이었던 글쓰기

여전히 나에게는 수단이다

나의 글쓰기는 ‘수단’이 되는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의 할아버지는 교육열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 가난했던 자신이 대학에 가지 못했던 한을 당신의 손주들에게 풀려 하시는 듯하다고, 엄마는 이야기했다. 

그 탓이었는지 나의 부모님 또한 나에게 인생에는 대학 이외의 길은 없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어쩌면 자식을 향한 걱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만약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대학에 가는 것에 대해 의무감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그리 짐작한다.

‘방송대 가서 기술을 배워라.’

고등학교 입학 후, 성적이 나오지 않았던 나를 진정으로 포기하며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다. 물론 이때도 대학에 못 가거나 안 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나는 대학 이외의 길은 없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공부가 맞지 않았다. 내가 앓고 있던 정신병들이 문제였다고는 하지 않겠다. 그저 어른들이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모두가 괴물같이 공부하는 엘리트 학교에 우연히 떨어져 버린 내 운명을 원망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나는 평생 ‘노력’이란 것을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노력도 재능이라는데,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나. 근본부터 틀려먹었다며 나 자신을 미워하기를 수 차례는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대학에 ‘가야만’ 했다. 한국 사회 풍조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실패자로 보는 인식이 강했던 것도 있지만, 나는 할아버지와 부모님 때문에라도 고3이 지나는 다음 해에 대학 입학증서를 보여야만 했다.

그렇게 내가 자각한 첫 글쓰기는 엄마를 향한 설득문이었다. 이것이 엄마의 눈에 직접적으로 보여지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글도 아니었다. 그저 설득의 말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메모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나는 대학에 가야만 한다는 말로 엄마를 열심히 설득했다.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우울증 치료가 대학을 향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사실은 대학이 우울증 치료를 향한 수단이었지만. 다른 이유를 대며 우울증 치료를 호소하기에는 나는 엄마를 설득할 만한 무기가 없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일기를 쓰는 방법을 배웠다. 표출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생전 짧은 일기 한 줄 써본 적 없는 나는 감정을 표출할 수단으로 짧은 글쓰기를 익혔다. 



시간이 흘러 고3이 되었다. 우울증 치료를 계속했지만, 차도는 없었다. 슬슬 인생에 위기감이 생기기 시작했다.무엇이든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생활기록부에도 기재하지 못하는 외부 대회에 나갔다. 내가 참가한 분야는 글, 그중에서도 수필이었다. 그 대회라면 대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이상한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라고는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내가, 수필을 장장 1만 자씩이나 써 내려갔다. 기말고사 준비는 물론이고 당장 닥쳐올 모의고사 준비도 하지 않았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그 글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블루투스 키보드까지 장만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첫 블루투스 키보드였고, 키보드라는 것으로 써 내려갔던 첫 수필이었다. 그렇게 작디작은 핸드폰 화면에서 내 첫 글이 완성되어갔다. 아무것도 못 하는 내 처지를 비관하며 쓴 음울한 글이었다. 그런데도 그 글이 사람들의 무언가를 자극했나 보다. 처음으로 쓴 글은 나에게 대상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수능을 약 3달 앞둔 시기가 되었다. 나는 외부 대회에서 받은 그 대상을 빌미로 엄마를 또다시 설득했다. ‘글로 대학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당장 지금까지 해오던 공부로도 대학에 가지 못할 판인데 한 번도 안 해본 분야로 대학에 가겠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 내가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에게 글쓰기는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학교 성적으로 입시에 도전하는 남과 나를 분리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나는 위에서 대상을 탔다는 그 글 하나만을 가지고 입시 학원을 찾아갔다. 달리 보여줄 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글을 수단으로 입시 학원에 들어갔다. 

지금도 나는 내 글을 수단으로써 보고 있다. 내 말을 전해줄 수단, 내 분풀이를 해줄 수단, 내가 돈벌이하게 해줄 수단…참으로 속물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글쓰기를 놓지 못한다. 언제나 글을 쓰기 싫다 중얼거려도,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학을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위기감에 내몰려 써 내려간 글은 현재 인생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나는 내 글을 수단으로 삼아 잘만 살아왔던 것 같다. 친구들을 사귀기 위한 수단으로 짧게 써 내려간 소설, 내 재미를 위해 수행평가에서 맡았던 각본 등…운명론자 같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나는 삶을 살아낼 수단으로 글을 선택할 운명이었나 보다. 부디 이 수단을 놓지 않고 끝까지 가져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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