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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구 Nov 30. 2015

Lost in translation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합니다.


'네가 말 한 <Lost in translation>을 보고 있어-'


 먼 이국땅에 있는 남자친구가 말했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이었고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 영화를 보고 있다는 말에 (비록 같은 화면은 아니지만) 그 영화를 함께 보기 위해 억지로 따뜻한 침대를 벗어났다.


 '어디쯤 보고 있어?'

 '28분 30초?'


 남자친구와 나는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오는 유로스타에서 만났다. 우린 각자 홀로 여행을 온 나홀로 여행객이었고, 때마침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우린 3시간쯤 되는 기차 시간 동안 즐겁게 대화했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각자가 파리에서 보내기로 한 일주일을 함께 했다. 다행히 우린 여행 취향이 비슷한 좋은 동행이었다. 한 명이선 먹기 힘든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었고, 비가 와서 걷기 힘든 날엔 함께 영화관을 갈 수 있었다. 햇볕이 좋은 날엔 적당한 술기운과 함께 잔디밭을 누워 있을 수 있었고, 끊임없는 대화와 함께한 걸음은 10회권이나 끊었던 지하철 티켓을 반도 못 쓰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꼬박 함께 보냈던 마지막 밤, 각자의 일정에 맞춰 '서울에서 보자'라는 인사와 함께 돌아선 그 순간,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아주 오래된 연인이 제법 그럴싸한 이유로 헤어지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파리에서 헤어졌다.



매일 걸었던 세느강이었지만 이 날의 석양만큼은 완벽했다.


 그런 너와 다시 만난 건 내가 먼저 포르투갈로 넘어와서였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던 나는 다시금 나홀로 여행자가 되어야 했고 너 역시나 그랬다. 그런 네가  다음날 '네가 없는 파리는 재미가 없어. 널 따라 포르투갈로 갈까?'라는 말을 했을 때, 네가 괜히 무리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낯선 공간에서 누군가가 나를 만나러 온다는 사실 만으로도 좋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내게 포르투로 따라갈까 물어봤던 그 때 이미 비행기 발권을 끝 마쳤었다고 했다.)


 너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 좋았던 파리에서의 기억을 남긴 일기를 다시금 읽었다. 오를리 공항에서 포르투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남긴 메모에는 '좀 더 많은 감정들을 정리하고 싶은데 사실 마치  오래전 이야기처럼 기억이 잘 안난다. 잘, 그리고, 기왕이면 예쁘게 봉인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적혀있었다.


 <Lost in translation: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처음 봤던 건 학부 3학년 때였다. 당시 남자친구가 소피아 코폴라의 팬이었고, 덕분에 나 역시나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영화의 연출은 좋았지만 각자의 마음과 욕심이 드러나지 않는 엔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된 말로 간 보다가 끝난 이 관계가 그저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영화는 촬영차 도쿄를 들린 한 물간 할리우드 배우(빌 머레이)와 남편의 출장을  따라온 여자(스칼렛 요한슨)가 도쿄 내 고급 호텔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100분여 러닝타임 동안, 두 사람은 도쿄라는 '낯선' 공간에서 각자가 가진 근원적 외로움을 '낯선' 서로를 통해  위로받는다. 자칫 (남자친구의 말을 빌어) 구질구질한 치정극이 될 수도 있는 이 영화는 그렇게 각자의 선을 지킴으로써 엔딩 씬에서 이상한 에너지를 얻게 된다.



아름답고 화려한, 하지만 외로운


 사실 나와 남자친구의 관계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우리의 여행이 자칫 생활로 연장되는 순간, 다른 빛으로 바래 질까 봐 두려웠다. 그 친구의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순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 낯설음이 이 친구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그래서 그렇게 좋은 순간들을 함께 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이상했다.


 하지만 자칫 두려웠던 여행의 연장으로 우리는 또 다른 기억들을 공유했다. 우리에겐  반짝반짝 빛났던 포르투가 생겼고, 지는 해가 아름다웠던 리스본이 있었다. 7시간이나 달린 야간 버스 사이에 본 반짝이는 은하수들이, 자욱한 연기와 시간을 잃은 듯한 세비야의 밤거리를 우리는 함께했다.


'그거 알아? 난 요즘 내가  살아온 최근 10년 중 제일 행복해'


 리스본으로 가던 오후의 버스 안에서 네가 말했다. 순간 나는 이상한 에너지를 얻었다. 이 친구의 화양연화를 내가 함께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간다는 위로만으로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생각보다 퍽 멋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처음으로 그 친구에 대한 기대 또한 생겼다. 나라는 사람이 이 친구를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있겠구나-라는, 그런 기대 말이다.


 때마침 영화 속 엔딩이 떠올랐다. 그리곤 어린 시절, 이 영화의 마음에 들지 않던 그 엔딩을 30대를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스치는 수 많은 인연들 속에서 그 짧은 반짝거림을 기억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를. 그것만으로 이 커다란 지구가 조금은 덜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확신 말이다.



외로운 행성 지구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당신에게


 물론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여행의 에너지가 다하여 마음이 떠날 수 있으며, 유럽과 한국보다 훨씬 먼 거리의 롱디로써 서로의 믿음이 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내 삶에 있어, 그리고 네 삶에 있어  그때 그 순간을  되돌아보았을 때, 충분히 좋은 에너지가 될 기억을 우리는 함께 했다는 것이다. 혹여나 우리가 서로 다른 선 위를 살아갈지 언 정, 그 각자의 선 위에서 함께한 에너지로 행복해질 수 있기를... 도쿄 한 가운데서 헤어진 빌 머레이와 소피아 코폴라도 분명 다른 선 위에서 행복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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