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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구 Nov 28. 2015

코인 세탁소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합니다.


 처음 코인 세탁소를 갔던 건 4년 전 제주도였다. 9월의 제주도에 미혹된 당시 남자친구와 나는 계획된 3박 4일의 여행 일정을 늘렸다. 상대적으로 시간에 여유로운 일을 하던 두 사람이었기에, 돈만 있다면 여행 일정을 늘리는 건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세탁'이었다. 계획에 없던 일정에 이미 가져온 옷들은 더러워졌고, 특히나 세탁에 유별난 난 그 날의 다른 일보다 우리의 더러운 옷을 어떻게든 세탁하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게스트하우스의 세탁 시스템이 활성화 되질  않았을뿐더러 제주도 자체가 크게 개발되지 않아 어떻게 세탁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행히 인터넷 서칭으로 리조트 내 코인 세탁소를 발견한 우리는 캐리어 가득 빨랫감을 채워 그곳으로 향했다.


 지하에 위치했던 코인 세탁소는 따뜻한 섬유유연제 냄새로 가득했다. 지하였지만 채광이 좋아 제법  따뜻한 데다가 습도까지 적당하여 굉장히 아늑했다. 우리는 곧장 가지고 있던 옷들을 흰색과 그 외의 것들로 구분하여 세탁기에 넣었다. 이미 동전교환기에서 바꾼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가득 쥐고 있자니 괜스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곧 우리의 빨랫감은 따로 판매하는 일회용 세제와 함께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빨래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우린 바로 앞 소파에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것도 그럴 것이 빨래가 돌아가던 15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온도, 그 분위기 모두가 완벽했다. 그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속에는 이상한 여유가 있었다. 온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얻은 것만 같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세탁기는 우릴 대신하여 충분히 바빴고, 우리는 여유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빨래는 끝났고, 축축하고 거대한 빨랫감을 건져내 건조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론 따뜻한 건조기 돌아가는걸 훨씬 좋아하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둥글둥글해지는 기분이다. 거기다가 종이형 섬유유연제 한 장만 추가하면 좋은 냄새가 그 공간에 가득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이 그렇게 좋은 냄새와 여유들로 한가득 채워진다. 그게 그렇게 좋았다. 그렇게 건조기까지 돌리고 나면 깨끗하게 세탁된 따뜻한 옷이 내 품에 들어왔다. 사실 세탁을 하는 과정도 과정이지만, 세탁된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건조기의 따뜻함은 그것을 안고 집으로 가는 내내 지속되어 여운이 남았다. 그게 좋아서 서울에  돌아온 이후에도 우린 가끔 코인 세탁소를 찾았다. 대부분 이불 빨래였고, 그래서 제법 이용시간도 길었다.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면서 우린 늘 언제나 이어폰을 나눠 들었다. 그런 코인 세탁소는 우리의 심야 데이트 코스 중 제일 좋은 하나였고, 아마도 그게 제일 좋았던 건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한 처음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을 우리는 함께 공유했었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찾은 코인 세탁소. 다행히 영어 사용법이 표기 되어 있었다.


 얼마 전 다녀온 여행지에서도 코인 세탁소를 들렀다. 꽤 오랜 여행을 이미 지나왔던 차에 빨랫감은 쌓여있었고, 낯선 숙소 호스트를 만나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은 근처 관광지도, 맛집도 아닌 코인 세탁소의 위치였다. 다행히 숙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코인 세탁소가 있었고, 그 날 밤 나는 빨랫감을 두 팔 가득 든 채 코인 세탁소로 향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나는  또다시 빨래를 돌렸다.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면서 폴폴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를 맡고 있자니 그제까지 낯설기만 하던 공간이 점점 익숙해졌다. 적당한 습도와 온기가 낯선 것들만 접했던 여행지에서의 감정과는 다른 익숙함을 줬고 이내 행복해졌다. 


 그러다 문득,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먼 사람이 된  그분이 떠올랐다. 한참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당신의 사랑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을 함께 공유했었다. 


 빨래는 끝났고, 숙소로 돌아오는 품 속에는 코인 세탁소에서 만난 익숙함과 여유가 잘 말려진 빨랫감이 되어 있었다. 숙소에 가는 내내 그 빨랫감에 코를 파묻으면서 낯선 공간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향기 하나를 얻은 느낌이었고, 특별해졌다. 그 감정만으로도 앞으로도 나는 여행지에서의 코인 세탁소를 매번 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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