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합니다.
'네가 말 한 <Lost in translation>을 보고 있어-'
먼 이국땅에 있는 남자친구가 말했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이었고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 영화를 보고 있다는 말에 (비록 같은 화면은 아니지만) 그 영화를 함께 보기 위해 억지로 따뜻한 침대를 벗어났다.
'어디쯤 보고 있어?'
'28분 30초?'
남자친구와 나는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오는 유로스타에서 만났다. 우린 각자 홀로 여행을 온 나홀로 여행객이었고, 때마침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우린 3시간쯤 되는 기차 시간 동안 즐겁게 대화했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각자가 파리에서 보내기로 한 일주일을 함께 했다. 다행히 우린 여행 취향이 비슷한 좋은 동행이었다. 한 명이선 먹기 힘든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었고, 비가 와서 걷기 힘든 날엔 함께 영화관을 갈 수 있었다. 햇볕이 좋은 날엔 적당한 술기운과 함께 잔디밭을 누워 있을 수 있었고, 끊임없는 대화와 함께한 걸음은 10회권이나 끊었던 지하철 티켓을 반도 못 쓰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꼬박 함께 보냈던 마지막 밤, 각자의 일정에 맞춰 '서울에서 보자'라는 인사와 함께 돌아선 그 순간,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아주 오래된 연인이 제법 그럴싸한 이유로 헤어지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파리에서 헤어졌다.
그런 너와 다시 만난 건 내가 먼저 포르투갈로 넘어와서였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던 나는 다시금 나홀로 여행자가 되어야 했고 너 역시나 그랬다. 그런 네가 다음날 '네가 없는 파리는 재미가 없어. 널 따라 포르투갈로 갈까?'라는 말을 했을 때, 네가 괜히 무리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낯선 공간에서 누군가가 나를 만나러 온다는 사실 만으로도 좋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내게 포르투로 따라갈까 물어봤던 그 때 이미 비행기 발권을 끝 마쳤었다고 했다.)
너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 좋았던 파리에서의 기억을 남긴 일기를 다시금 읽었다. 오를리 공항에서 포르투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남긴 메모에는 '좀 더 많은 감정들을 정리하고 싶은데 사실 마치 오래전 이야기처럼 기억이 잘 안난다. 잘, 그리고, 기왕이면 예쁘게 봉인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적혀있었다.
<Lost in translation: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처음 봤던 건 학부 3학년 때였다. 당시 남자친구가 소피아 코폴라의 팬이었고, 덕분에 나 역시나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영화의 연출은 좋았지만 각자의 마음과 욕심이 드러나지 않는 엔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된 말로 간 보다가 끝난 이 관계가 그저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영화는 촬영차 도쿄를 들린 한 물간 할리우드 배우(빌 머레이)와 남편의 출장을 따라온 여자(스칼렛 요한슨)가 도쿄 내 고급 호텔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100분여 러닝타임 동안, 두 사람은 도쿄라는 '낯선' 공간에서 각자가 가진 근원적 외로움을 '낯선' 서로를 통해 위로받는다. 자칫 (남자친구의 말을 빌어) 구질구질한 치정극이 될 수도 있는 이 영화는 그렇게 각자의 선을 지킴으로써 엔딩 씬에서 이상한 에너지를 얻게 된다.
사실 나와 남자친구의 관계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우리의 여행이 자칫 생활로 연장되는 순간, 다른 빛으로 바래 질까 봐 두려웠다. 그 친구의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순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 낯설음이 이 친구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그래서 그렇게 좋은 순간들을 함께 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이상했다.
하지만 자칫 두려웠던 여행의 연장으로 우리는 또 다른 기억들을 공유했다. 우리에겐 반짝반짝 빛났던 포르투가 생겼고, 지는 해가 아름다웠던 리스본이 있었다. 7시간이나 달린 야간 버스 사이에 본 반짝이는 은하수들이, 자욱한 연기와 시간을 잃은 듯한 세비야의 밤거리를 우리는 함께했다.
'그거 알아? 난 요즘 내가 살아온 최근 10년 중 제일 행복해'
리스본으로 가던 오후의 버스 안에서 네가 말했다. 순간 나는 이상한 에너지를 얻었다. 이 친구의 화양연화를 내가 함께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간다는 위로만으로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생각보다 퍽 멋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처음으로 그 친구에 대한 기대 또한 생겼다. 나라는 사람이 이 친구를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있겠구나-라는, 그런 기대 말이다.
때마침 영화 속 엔딩이 떠올랐다. 그리곤 어린 시절, 이 영화의 마음에 들지 않던 그 엔딩을 30대를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스치는 수 많은 인연들 속에서 그 짧은 반짝거림을 기억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를. 그것만으로 이 커다란 지구가 조금은 덜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확신 말이다.
물론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여행의 에너지가 다하여 마음이 떠날 수 있으며, 유럽과 한국보다 훨씬 먼 거리의 롱디로써 서로의 믿음이 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내 삶에 있어, 그리고 네 삶에 있어 그때 그 순간을 되돌아보았을 때, 충분히 좋은 에너지가 될 기억을 우리는 함께 했다는 것이다. 혹여나 우리가 서로 다른 선 위를 살아갈지 언 정, 그 각자의 선 위에서 함께한 에너지로 행복해질 수 있기를... 도쿄 한 가운데서 헤어진 빌 머레이와 소피아 코폴라도 분명 다른 선 위에서 행복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