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관홍 잠수사를 추모하며
향 냄새가 나지 않은 장례식장이었다. 일손이 부족하다 하여 찾았지만 낮이라 손님이 적어 거들 일이 없었다. 간간히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허망한 죽음에 찬송사 몇 곡이 무슨 위로가 될까. 그 슬픔을 다 위로하려면 300곡이 넘는 찬송가를 다 불러도 모자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의 죽음의 순간에도 늘 찬송가가 있었다. 장례식장의 찬송가는 늘 극적이다. 그 극적인 가락에 극도의 슬픔을 맡긴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장례식장에는 대 여섯 명이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나르는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고인의 일가친척으로 보이진 않았다. 간간히 야당 국회의원들의 얼굴도 보였고 백기완 선생도 조문을 왔다. 장례식장은 소위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등장할 때면 약간 어수선해졌다. 여타의 장례식 분위기와 다르게 손님이 상주를 위로하는 게 아니라 모인 자들이 서로를 위로했다. 고인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이 어디까지나 공적인 죽임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그게 슬펐다.
김관홍 잠수사의 자녀들로 보이는 검은 상복 입은 아이들이 복도를 오갔다. 순간적으로 그들의 얼굴에서 슬픔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싶어 이내 안심하기를 수 초,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고인의 첫째 딸과 비슷한 또래였던가. 고대하던 육지 근무를 앞두고 마지막 항해를 하던 엄마의 남동생이 침몰 사고로 실종되었던 그 날, 그 혼비백산한 상황실과 짐승 같은 울음이 가득했던 장례식장.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쫓고 있었다. 내가 오 학년이었으니 사촌 동생은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그때 내 눈에 사촌 동생은 마냥 신이 나 보였지만 거기 있는 그 누구도 동생에게 엄숙하게 그 슬픔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딱하게 보았을 뿐. 나는 눈물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모친의 슬픔을 위로하느라 그 곁을 맴돌았다. 김관홍 잠수사의 큰 딸이 남편 잃은 엄마를 이앙 다물고 지켜내고 있다는 수사들이 넘쳐난다. 아마 김관홍 잠수사의 자식들, 적어도 큰 딸은 예민하게 느끼고 있을 거다. 그 수많은 시선들을.
추모식은 슬펐다. 4.16 연대,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 협의회, 박주민 의원, 특별조사위원회, 동료 잠수사 등 하나 빠짐없이 세월호 참사로 맺은 인연들이 추도사를 이어갔다. 그의 삶이 세월호 참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어도 세월호 참사 이전의 삶을 즐겁게 추억할 수 있는 추모사는 없었다. 나는 그게 슬퍼서 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심하게도 향과 색이 요란한 꽃을 사서 물을 주었다. 그의 죽음에 나는 나를 그렇게 위로했다.
고 김관홍 잠수사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오.
2016.6.19